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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진상》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발언자의 신원을 표기하기 위해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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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 ch.2 일상편
<주황은 고통, 파랑은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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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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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전, ???의 아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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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귀찮아, 난 빼주라."

-라고 '나'는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사실 낮잠은커녕 잡지에 집중하느라 졸고 있지도 않았지만 그 화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걸 어필해보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이었다.

아무래도 '나'의 노력따위 멧돼지에겐 아무런 감흥도 없었던 모양이지만.


시무라 카리나: "아아?! 뭐라카노, 니 쫄보가?!"

그 땅딸보 코미디언은 '나'의 멱살을 휘어잡으며 (이때 얼굴 가까이에 대고 읽던 잡지를 놓쳤는데 잡지는 저 멀리 날아가 존나 무거운 소파 아래 틈새로 쏙 들어가버렸다. 도무지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아 결국 그날 저녁 귀갓길에 새로 한 권 샀다.) 얼굴에 침이 다 튀도록 떠들어댔다.

시무라 카리나: "마,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를 갖다 쫄고 앉았노! 방송 출연이다, 방송 출연! 보통 방송도 아니고 월드와이드! 이건 엔터테이너라면 마다해선 안 될 영광인 거 모르나!"



아아. 방송 출연.

필시 <천공호텔 단간론파>라는 단간론파 시리즈의 특별 기획의 얘기일 것이다.

요약하자면 '당신을 초고교급들에게 대항할 플레이어로 초청합니다'라는 내용의 초대장이 배달된 건 사흘 전의 일이었다.

이번 단간론파는 매우 특별해서 제대로 된 초고교급들과 겨뤄서 이겨낼 특별한 시청자들이 필요하다던가.

요즘같은 시대에 우편 초대장이라니, 수상하기가 짝이 없다고 느꼈지만 일단 방송사에 확인해본 결과 해당 프로젝트가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던 건 사실인 모양이었고…. (캐스팅의 경우엔 극비리 중에서도 극비리라 그쪽에서도 확답을 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 녀석들'(대략 시청자 대표로 활약할 나 이외의 녀석들)에겐 수상하기 짝이 없는 초대장이란 물건은 더할 나위도 없이 값진 보물이었다는 게 앞으로 벌어질 모든 사단의 시발점이었다.

이 배운 것 없고, 고집 강한데다 시야는 좁은 쾌락주의자 녀석들에게 그런 고오급 떡밥을 던지다니.

덥썩 물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방송 출연, 그것도 하필이면 '단간론파'라니. 싫어. 죽어도 싫다.



"스스로가 엔터테이너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걸. 난 어디까지나 자기만족형 쾌락범이지, 서비스 정신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다고. 멧돼지, 너처럼 대단한 사명감 따위 느끼지 않는단 말야."

시무라 카리나: "이 숨 죽은 시래기 같은 새꺄. 누굴더러 멧돼지라 카노! 그게 여자한테 붙일 별명이가! 앙?!"

후네즈 신지: "므후훗. 진정해, 카리나 쨩. 사람을 동물처럼 부르는 건 류 쨩의 나쁜 버릇 같은 거니까. 그냥 넓은 아량으로 보듬어주라구."


구석에서 못생긴 아줌마 형상 따윌 조각하던 신지가 대뜸 거들었다. 역시,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편들어 주는 건 저 녀석 뿐이다. 분위기가 음침한데다 성벽이 좀 역겹긴 하지만.


"아아, 맞아. 나는 보호관찰이 필요한 부진아니까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줘. 아, 나 불쌍해. 내가 날 쓰다듬어주고 싶어."

시무라 카리나: "하이고. 고놈의 주댕이. 말이나 못하믄…."

"게. 다. 가. 멧돼지 양. 방송 출연 같은 걸 했다간 다시 조직으로 돌아오기 어려워질 걸. 얼굴이 팔리는 순간 수수께끼의 유쾌범 놀이는 평생 못 하게 된다고. 체포되지나 않음 다행이지."

후네즈 신지: "어라. 경찰에 체포될 법 한 일을 했었던가, 우리?"


네놈은 지난번 작전 때 코뿔소 거시기에 낙서를 했잖냐. 반드시 체포될 법한 일이야, 그거. 누가 제발 좀 이녀석들에게 현실을 알려주라. 이 사회의 안녕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니까, 진짜로.


시무라 카리나: "아 쫌, 그냥 좀 하면 안되나! 마, 이런 기회 더 없다니까?!"

"아 거, 싫어요. 조직에 다른 놈들 많은데 왜 꼭 나여야 해? 그런 거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

시무라 카리나: "안된다 안카나! 딴 놈들은 너무 똑똑해서 내 우승에 방해된다꼬~ 니처럼 무능한데다 의욕이라곤 조금도 없는 인간 언저리가 딱 제격이다!"

"아 거 참 말 좀 돌려서 듣기 좋게 합시다…."


속내를 숨길 생각도 없는 그 점이 참 괘씸하다. 꼭 틀린 말도 아니고 들어보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점도 있었지만.


후네즈 신지: "그보다 의외네, 류 쨩. 류 쨩은 단간론파의 팬 아니었어?"

시무라 카리나: "엥? 이건 또 무슨 말이고?"

"어이. 신지. 그만. 그만둬."

후네즈 신지: "그 왜, 캐릭터 상품 같은 것도 전부 사모으고~ 초고교급 행운이었던가? 그 캐릭터 좋아했잖아? 또…."

"―예전 일이야."


더 쓸모없는 말이 나오기 전에 딱 잘라 부정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이야기따윌 기쁘게 늘어놓아봤자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 게 당연하다.

그야….


"나는 3편 애니에서 세뇌비디오 나올 때부터 탈덕했다고. 그딴 유아적인 컨텐츠를 아직도 빨고있냐. 대가리 덜 깨졌네. 덜 깨졌어."

시무라 카리나: "아앙?! 뭐라카노! 니 지금 말 다했ㄴ…."

레이몬 하루히: "얘들아, 요 앞에 오픈한데서 스콘 사 왔어― …어라? 싸우던 중?"

'나', 신지, 카리나: "아닙니다!!"


약속시간보다 30분 정도 뒤늦게, 하지만 양손 가득히 따끈따끈한 빵과 커피를 싸들고 온 하루히의 등장에 일단 그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후, 일단 커피와 빵이다. 커피와 빵.

인류사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이 두 가지 보물에 구원받았던가.

따뜻한 커피에 달달한 빵을 먹으며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대화하다보면, 카리나의 이 멧돼지 같은 고집도 언젠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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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씨발."

레이몬 하루히: "류이치 군, 그런 심한 욕은 쓰지 마."


하지만 그 숱한 발버둥과 하루히가 사다준 커피, 스콘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 이름은 <천공호텔 단간론파> 참가자 명단에 당당하게도 올라가버렸다.

보나마나 멧돼지 녀석의 수작이다. 아니, 항상 의외의 포인트에서 뒤통수를 치는 면이 있는 신지의 짓일지도.

젠장, 같이 나가는 사람이 인간언저리든 뭐든 간에 스스로 좀 존나게 파이팅 할 생각을 하란 말이다. 멧돼지 녀석아. 어차피 상대는 초고교급이라는데 같은 팀을 견제해서야 벌써 승산이 없는 싸움이잖아.

어쨌건간 이쪽 4인의 출연이 확정된 후 방송사 측에선 '초고교급 출연자'들의 자세한 신상정보가 담긴 파일들을 보내왔다.

마치 줫밥 고삐리들이 초고고급들에게 조금이라도 버텨내기 위해선 이 정도 어드밴티지라도 없으면 안된다는 듯이 말이다.

아~주 정확히 보셨다.

출연을 결정한 우리 4인('나'도 일단은 끼여서)도 염치도 없이 그 정확한 소견에 동의해, 주최측에서 제공한 정보를 몇날 며칠을 외우고 분석하고 예측해가며 가상현실 살인게임에 대비했다.

여기서 내 입버릇대로 참가자들에게 동물 별명을 지은 게 화근이 되어 시청자 대표 4인은 사흘만에 정체 발각이라는 대참사를 당하게 되지만 그건 한참 뒤의 일.

당장 우리에게 닥친 숙제는 '어떤 초고교급 학생과 파트너를 맺을 것인가'란 문제였다.


"초고교급 학생 사이에 섞여서 2인 1조라니. 이거 시청자 대표의 정체를 숨겨줄 생각은 있는 거냐. 뒤늦게 이런 룰을 추가한 이유가 뭘까?"

레이몬 하루히: "왜. 초고교급과 짝이라니, 말만으로도 난 좋은걸."

시무라 카리나: "내는 너무 안 튀는 놈이 좋은디. 내보다 존재감이 크면 카메라에 안 잡힐 꺼 아녀."


벌써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우리 피에로 아가씨들.
대체 누구의 독촉으로 누가 방송에 출연하는지 알아볼 수가 없는 시츄에이션이다.

파트너를 고민하는 시무라에게 신지가 가볍게 한 마디 조언했다.


후네즈 신지: "흐음~ 튀는 게 싫다고. 그렇담 검은양(초고교급 사서)는 어때?"

시무라 카리나: "엑. 금마는 뭔가 가늘고 길게 갈 인상이라 싫은디. 별로 '초고교급' 같이 보이지도 않고마."


그게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싫어할 일이냐.


시무라 카리나: "차라리 고슴도치(초고교급 변호사)가 낫겠고마. 그럭저럭 기럭지는 있지만 시선을 끌 것 같진 않고. 여차하면 든든한 내 편도 되주지 않겠나? 명색이 변호산디."

후네즈 신지: "오호. 활약이 기대되는 한 쌍인걸. 그럼 나는… 이 아이로 할까."


신지는 이런저런 문서가 어지러져있는 책상 위에서 반짝거리는 회색 머리가 인상적인 푸른 눈의 소녀 사진을 집어들었다. 이미 지난 며칠동안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을 만큼 새겨놓은 얼굴이지만, 책상에 둘러앉은 모두가 다시금 감탄을 내뱉을 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이었다.


"초고교급 동화작가? 너무 사심 채우기 아니냐? 큭. 투샷이 상상이 안가는데. 천국과 지옥 같잖아."

후네즈 신지: "후훗. 그렇게 말해도 아주 부정할 생각은 없는 걸. 하지만 그런 건 아니고, 사실 이 아이가 모든 초고교급들 중에서 가장 존재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거든."

시무라 카리나: "'존재가 수수께끼'…? 무슨 외계인이나 도시전설처럼 들리는디."

레이몬 하루히: "도시전설 맞아…. 《붉은 발의 아리스 님》이라는, 몇 년 쯤 된 거긴 한데…. 조금이라도 독서에 관심이 있거나 미스터리에 빠삭한 사람이라면 알 법한 실종사건이야. 놀랍게도 우리가 받은 자료의 '아리스'가 바로 그 당사자인 것 같고."

시무라 카리나: "흥. 책 같은 거 읽어서 뭐하노. 묵지도 못하는 거."

"나도 동화 같은 파스텔톤 키워드에는 관심 없어서 모르겠네."

후네즈 신지: "어쨌든 난 이 아이로 픽스. 하루히 쨩은?"

레이몬 하루히: "난… <초고교급 펜싱선수>. 이유는…."

시무라 카리나: "뭘 이유씩이나, 뻔할 뻔자구먼. 으휴, 여시같은 뇬."

레이몬 하루히: "그, 그런 거 아냐…!"


아니라곤 하지만 하루히는 정육점 조명으로 써도 될 만큼 얼굴을 환히 붉혔다.

가벼운 놀림과 웃음으로 차례가 얼버무려지고선, 곧 남은 순서가 '나'밖엔 없다는 걸 깨닫고 놀랐다.


후네지 신지: "후훗. 그럼 류 쨩만 남았네. 난 류 쨩의 선택이 가장 궁금한걸. 항상 추녀 취향, 추녀 취향을 입에 달고 살던 인간의 선택은~?"

"아아, 뭐. 나라면 당연히…."

시무라 카리나: "음~ 류이치는 로리콘처럼 생겼으니까 거북이(초고교급 랭킹메이커)를 고르지 않을라나."

"어이."

레이몬 하루히: "아냐. 류이치 군은 도 M인 척 하는 도 S니까, 적당히 기 세보이면서 살살 말로 약올리며 괴롭히기 좋아 보이는 사람으로 고를 것 같은데…."

"이야. 하루히가 날 기가막히게 잘 아네. 네에, 인간언저리 류쨩의 파트너 선정은 해당 기준으로 진행되었답니다."

레이몬 하루히: "우와아, 진짜였어…. 농담으로 한 말인데…."

시무라 카리나: "기분나쁜 새끼…."

후네즈 신지: "후훗. 자, 그러면 이번엔 진짜로. 류 쨩의 변태성욕의 희생자가 될 그 어린양은 누구~?"

"그야…."


모두의 열렬한 성원과 기대 속에, '나'는 만지작대던 스테이크 나이프로 '그 녀석'의 얼굴 사진을 깔끔하게 내리찍었다.


"당연히 이 녀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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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터무니없이 가벼운 사고회로의 작동대로 '나'는 흰토끼와 짝을 이뤘다.

'나'의 심술 섞인 장난이 아니었더아면 아마 흰토끼는 그렇게나 아끼는 도박사 친구 녀석과 한 태그를 이룰 수 있었겠지.

…이후에 그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을 생각해보면, 그 결정은 내가 평생 남긴 숱한 과오들 중에서도 가장 질 나쁜 것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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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게임 1일차, 태그 A의 개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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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존나게 쫄리네…."



눈 앞에서 대롱대롱거리는 밧줄 매듭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발 아래선 균형이 살짝 안 맞는 의자가 불안하게 덜컹거렸다.


<단간론파> 출연은 역시 크나큰 실수였다.

가상현실이래서 적당히 픽션 티가 날 줄 알았더니, 지나치게 리얼하다.

그레이트 에구이사루가 자기 몸집에 비하면 개미만한 몸집의 여고생을 짓밟아버리는 걸 보고선 허리깨가 오싹해졌다.

피가 튀고, 팔다리가 부러지고….

그런 건 재현율이 아무리 뛰어나봐야 좋지 못하다.

픽션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픽션이기에 의미가 있는 법.

픽션이 현실 흉내를 내거나, 현실이 픽션 흉내를 내는 순간부터 세계는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개막부터 문답무용으로 한 명을 아웃시켜놓고 시작할 셈이었다니. 무슨 그런 근본없는 전개가 다 있는가?

심지어는 '초고교급 보디가드'가 그렇게 당하고 나서도 게임 오버가 안 되어서, 허둥지둥대며 개막을 뒤로 미루겠다니….

<단간론파>는 이미 옛적에 끝장났다는 사실만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내가 알던 그 단간론파는 더는 없다.

이런 답도 없는 공간의 공기는 잠시라도 더 마실 수가 없다.

빨리 뒤지고 현생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에서 창고에서 조용히 밧줄을 챙겨 개인실에 몸을 감췄다.

멧돼지 녀석도 이해해주겠지. 어차피 참가 조건만 맞추면 되는 거였으니까 이쯤에서 발을 뺀다고 해도 별 불만은 없을 거다.

문제는 본능이었다. 인간이기 이전 생명으로서 DNA에 깊숙히 새겨진 생존 본능.

아무리 가상현실이라는 단어를 되뇌이고 되뇌여도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시발, 뒤진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숨이 죄어들거나 목이 부러지는 고통은 그대로 느껴질텐데!



그렇게 천장에 매단 밧줄을 양손으로 고이 쥔 기묘한 자세로 얼어붙어있길 한 시간 여.

복도를 지나는 인기척에 청각이 먼저 반응했다.

사뿐 사뿐 카펫을 밟는 가벼운 구두소리.

기척을 감추는 게 버릇이 되어있지만 그럼에도 감추어지지 않는 존재감이었다.

곧 발소리의 주인이 현관문을 여는 전자음이 들려왔다.

아아. 예상대로.

흰토끼, 카미나기 한나.

그 녀석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이유 모를 소름이 말초신경을 타고 머리 끝까지 찌릿거리게 몸을 관통했다.

그리고 어째선지 그 녀석이 내 존재를 인지한 그 순간 '나'는 확신을 가지고 몸을 현생의 올가미 속으로 내던질 수 있었다.

안도감?

아니, 그건 100% 옳은 단어는 아닌 것 같다. 50% 정도.

그저 카미나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출판 만화와 실사 영화의 차이만큼이나 뚜렷해지는, 그런 모든 애매모한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역시 이게 현실일 리가 없다, 라는.




"카흑, 컥, 크흑…. 하악, 하아, 하아, 하악…!"

카미나기 한나: "당신, 정신이 좀 드시나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어, 어째서 목을…."

"하, 하악, 하아, 하아…. 큭! 크큭, 크하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카미나기 한나: "……."



카미나기가 겨우 기지를 발휘해 나를 그 가짜 세상에 붙들어두었을 때에도, '나'는 그저 웃었을 뿐이었다.

태엽이 고장난 인형처럼, 그것도 디자인이 유아용치곤 꽤나 해괴해서 밤중에 보면 까무러칠만한 그런 인형처럼 웃음이 자꾸만 터져나왔다.

발작이 의심될 정도로 미친듯이, 배꼽을 부여잡고 웃었다. 웃다가 지쳐서 울고 울다가 지루해져서 다시 웃고, 호흡이 넘어갈 때까지 또 웃다가 갑자기 배가 너무 아프다면서 손으로 바닥을 쾅 쾅 쳤다. 그러곤 손이 너무 아프다면서 울상을 짓다가 또다시 웃었다.

아아.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에게 이 꼴은 대체 어떻게 보일라나. 겁에 질렸을까? 아니면 다리가 많은 벌레에게서 얻는 혐오감 같은 걸 똑같이 느낄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약이라도 빤 것처럼 기분이 구름 위를 날아다녔으니까. 그래서 난 내 활발한 주둥아리가 자유분방하게 뛰어놀도록 줄을 풀어주었다.



"큭, 와 나 이거, 진짜 장난 아니네…! 가상현실 맞아? 진짜 뒤지는 것 같잖아?! 큭!"

카미나기 한나: "…저기요."

"큭, 크큭… 응? 아, 흰토끼구나? 거 타이밍 맞추는 재주 한번 좋네. 죽지도 못하고 목뼈만 살짝 흐물흐물해졌어. 덕분에 키가 좀 자란 것 같기도 하고."

카미나기 한나: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방금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냐고 물었습니다."

"뭐야, 화내는 거야? 아니, 화내는 것 치고는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는데…. 이게 그 포커 페이스라는 건가?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의 재능이라는 건 신기하구만."

카미나기 한나: "제 질문에 대답하세요."

"와- 이거 무섭네. 큭, 이쪽은 오히려 사과를 받아야 할 입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적반하장도 유분수구만."


한쪽 손으로 목을 어루만지며 넘어져있던 의자를 바로세워 걸터앉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미소지었다. 솔직히 존나 아파서 당장 응급실에 실려가고픈 상태였지만 가오가 몸을 지배한 상태라.


카미나기 한나: "사과? 적반하장? 그게 무슨…."

"방해받았잖아, 죽으려고 했는데.'

카미나기 한나: "네?"

"죽어버리려고 했다니까, 어차피 전부 가짜잖아? 모노쿠마, 그레이트 에구이사루, 이 밧줄, 이 테이블, 이 카펫과 양탄자…. 그리고 너! 난 가상현실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현실에 있는 젊고 싱싱하고 잘생긴 몸으로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단 말야. 애초에 난 여기 참가하게 된 것도 자의가 아니고, 죽어도 현실의 몸뚱이는 멀쩡하다며? 아주 잠깐의 고통만 견디면 이 이상한 나라를 벗어나서 그리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네가 꼬이게 만들었네. 멍청한 흰토끼."

카미나기 한나: "……."

"아까 곤죽이 된 보디가드 기집애를 살리겠다고 또 한바탕 쇼를 벌였었지. 잠깐 목을 맸을 뿐인 나도 정신을 못 차릴만큼 아픈데 그 작은 여자애는 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라나."

카미나기 한나: "아키하라 양은 고맙다고 했어요."

"고맙다는 말만 했어?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라는 말, 정말로 하지 않았나?"

카미나기 한나: "……."

"큭, 쉽네. 쉬워."

카미나기 한나: "…당신, 뭐에요?"


담백하면서도 경멸에 가득찬 비수 같은 낱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말을 뱉은 카미나기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미움받는데 익숙한 내게 그 정도 감정 분출은 아무런 사건도 아니었다.


"뭐냐니, 그야 뻔하잖아. 극상으로 잘 굴러가는 혓바닥을 지닌 초고교급 미식가, 카라스야마 류이치입니다. 엣큥! …이었던가? 큭! 아, 미치겠네! 아, 네 소개는 됐어. 벌써 다 알고 있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거든."

카미나기 한나: "……."



그때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이 카미나기 한나라는 인간은 그 짧은 순간에도 이미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걸.

그리고 흰토끼의 인도에 속절없이 빨려들어가 이상한 나라의 미아가 되어버린 '나'의 앞에 어떤 시련과 역경이 펼쳐질 지도, 몰랐다.

그때는 몰랐지만, 알았다고 하더라도 아마 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생의 많고 많은 불행한 사건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 역시 어디까지나 '나'의 손으로 직접 내린 선택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럼그럼, 잘 부탁해! 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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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게임 3일차, 심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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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나기 한나: "…어머. 이건 무슨 서프라이즈일까요?"

"나름 수고를 좀 들여봤는데 어때? 어떤 미식이든 플레이팅이 중요한 법이니까."

카미나기 한나: "……죽은 줄 알았는데."


상하 좌우 전후, 6면이 검게 늘러붙은 혈액으로 페인팅된, 마치 살해 현장을 연상시키는 호텔룸에서 '나'와 카미나기는 마주봤다. 날 쏘아보는 그 눈빛엔 아무리 좋게 포장해봐도 애정 비슷한 어떤 게 담겨있진 않았다.

카미나기 주위의 공기에서는 얕지만 칵테일 향이 풍겼다. 달콤하지만 도수가 낮진 않은 종류. 아마 알콜 기운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계획도 성공하지 못했겠지.

누군진 모르겠지만 여고생을 헤롱헤롱거릴 때까지 데리고 놀다니, 불순하잖냐.


카미나기 한나: "…어디에 숨어있었죠? 취하긴 했어도 나름 개인실 내부는 수색할만큼 수색했는데."

"저 큼지막하고 못생긴 그림이 그냥 장식용으로 달려있는 것 같아?"


'나'는 각자의 침대 머리맡 위로 큼지막하게 펼쳐져있는 두 장의 유화를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열리거든. 비밀번호만 안다면 간단한 조작으로 드나들 수 있는 간이 금고 내지는 벙커랍니다. 시청자 대표들에게 주어진 사전 정보 중에 끼어있었는데,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나 혼자 슬쩍 독점했지. 큭."

카미나기 한나: "…예수도 사흘은 기다리고 부활했는데요. 당신은 저 아늑한 무덤 속에서 세 시간도 채 못 기다리나요?"


주춤, 뒤로 한 발짝을 빼며 흰토끼는 쏘아붙였다. 평온하면서도 경계하는 눈빛.

무리도 아니다.

몸은 건강하면서 정신은 살짝 엇나가있는 고등학생이 나이프를 들고서 다가오면, '나'라고 해도 지레 겁에 질리고 말 테니까.

특히나 그가 방금 전까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일 때엔 더욱 그렇고, 주위가 온통 피투성이일땐 더더욱 그럴 테다.


"뭐, 궁금증은 해소했거든. 네 NG 행동의 작동원리에 대해서 말이야."


'나'는 씨익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미소지었다.


"거짓의 정의(定義)를 점검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카미나기 한나: "알아듣도록 이야기해주실래요?"

"네 NG 행동인 <거짓말을 한다>…. 이 '거짓말'이라는 게 굉장히 애매하거든. 물론 평범하게는 '진실과는 다른 말을 하여 상대를 속이는 것'을 이야기하겠지만, 이 '진실'이라는 게 또 문제야. 어디까지고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이 아닌지, 정확히 판단해줄 사람이 이 우주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뭐, 네 NG 카운트가 줄어들었다는 반응이 없는 걸 보아 결국 이번 주최측은 '발화자에게 상대를 속일 의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기준삼아 판단한 모양이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내겐 만족스럽지 못한 결론이지.

결국 넌 '카라스야마 류이치가 죽었다'는 말로 꽤 많은 사람을 낚아올린 양치기 소녀가 된 꼴이니까. 그것도 어느 관점으론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무지(無知)의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범주는 또 어디까지일까….

아아, 오만하도다. 오만해. 너의 그 NG 행동은 발칙하리만치 오만해서, 벌주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게 만들어."

카미나기 한나: "…제정신이 아냐. 당신은."

"큭, 알아채는 게 늦었어."



그 말과 동시에, '나'는 뒷걸음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진 카미나기를 벽에 몰아세웠다. 흔히들 벽치기라고 하는 그런 꼴이었다. 왼손엔 나이프가 들려있었다는 게 문제지만.

로맨틱하다기보단 크리미널한, 그런 위험천만한 맛이 우리 둘만의 색깔이다.

여전히 평온한, 하지만 더는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옆편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려버린 카미나기의 사과향 숨을 맡으며 난 속삭였다.



"죽자, 흰토끼. 방금까지 한 말은 모두 잊어버려. 내가 흥미가 있는 건 바로 너야.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죽어서 현실로 돌아가자. 이딴 해변가의 모래성이 아니라 제대로 된 현실에서 너와,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와 대화해보고 싶어. 이래뵈도 진심이야."

카미나기 한나: "싫어요."

"…어째서?"


단칼에 거절당했지만 당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긍정당했다면 놀랐겠지.


카미나기 한나: "거짓말쟁이의 진심, 참말쟁이의 거짓. 카지노 일을 하면서 항상 이 두 가지를 가장 조심하라고 배웠거든요."

"우와, 역시 초고교급다운 멋진 대답. 그런데 흰토끼… 왜 네게 선택권이 있다고 착각하는 걸까?"

카미나기 한나: "무슨… 꺅?!"



머리채를 휘어잡아 강제로 시선을 맞추자 그제서야 카미나기의 눈빛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살짝 맺힌 눈물. 무방비하게 드러나버린 목이라는 급소.

그 하얀 살결을 살짝 찌른 나이프 끝에서 그녀와 '나'의 온 신경이 맞닿는 감각이 느껴져, 살짝 황홀했다.



"먼저 가 있어, 따라갈테니. 미리 말해두지만 너 도망 못 가."

카미나기 한나: "…세요…."

"뭐라고? 잘 안들리는데."

카미나기 한나: "…때 …리지 …마세요…."

"……?"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때릴 게 아니라 죽일 건데. 당장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 이런 말이 나오는 건 대체 뭘까.


카미나기 한나: "아… 아픈 건 싫어요…. 제, 제발…. 잘못했어요, 하지만 때리지는 말아주세요…."

"…… ……."



머리채를 쥔 손아귀에서 벗어나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진 카미나기는 풀린 동공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며 계속해서 애원해왔다.

뭔가 기분나쁘고 질척거리는 게 속에서 끓어올랐다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바닷바람에 차갑게 식은 시멘트가 식도를 타고 흐르는 듯한 무겁고 이질적인 메스꺼움이 가슴을 가득히 메웠다.

손에 쥔 나이프를 잠시 내려다보다 카미나기의 앞에 힘없이 떨어뜨리곤, 말없이 식탁 앞에 의자를 빼서 앉았다. 식탁에도 의자에도 내가 흩뿌린 혈액이 늘러붙어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살인은 되지만 여자애 울리는 건 안된다고?

어디까지가 해도 되는 짓이고 어디까지가 해선 안되는 짓이야? 대답해라, 내 좁쌀만한 양심아.

젠장. 모르겠다.

아무리 가상현실이라지만, 이건 방금까지 칼로 사람을 찔러죽이려던 인간말종이 느껴도 되는 감정일까?



"……알아서 해. 겨우 생겼던 흥미가 사라졌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침이 밝기까지 우린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풀어헤쳐진 머리로 벽에 기대 늘어져 있던 카미나기만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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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게임 4일차 아침>




-




그리고 아침이 밝기가 무섭게 눈이 녹아버릴 만큼 밝은 얼굴로,

카미나기 한나: "아, 눈은 좀 붙였어요? 어머, 안색을 보아하니 한 숨도 못 잤나."

하며 먼저 말을 걸어오는 그 강철같은 비위에는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수밖엔 없었다.

오히려 몸도 마음도 악취를 풍기는 내 쪽이 코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구더기 같은 거 잘 만지지? 지금이라도 외과의 쪽으로 공부해볼 생각 없어? 진지하게 건의하는 거야."

카미나기 한나: "스스로를 구더기에 비유하는 그 냉철하고 정확한 자아성찰에는 박수를 쳐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의료계에는 저보다 더 바른 인성을 지닌 분들이 구슬땀을 흘려주실 거라고 믿네요."

"뭐야, 그게."

카미나기 한나: "그런데요, 이제 자살 안 하나요?"

"안 해. 흥미가 식었어. 그보다 이봐, 좀 더 말을 돌려 하는 캐릭터 아니었어?"

카미나기 한나: "어머. 죄송해요. 일부러 했어요. 이제는 진짜 생리적으로 무리니까 좀 죽어줬으면 해서. 게다가 당신이 멀쩡하게 호텔을 활보하고 다니면 제 입장이 곤란해지잖아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다고요."

"평판을 위해 사람을 자살시키는 건 썩은 정치인이나 할 짓거리야, 이 여자야."


그녀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나'의 양심은 더더욱 무참히 난도질당했다.


카미나기 한나: "그런데 한편 다른 생각도 들어요."


가볍게 무시하며 흰토끼는 머리끈을 고쳐묶었다. 이 불편한 동거 생활의 딱 한 가지 좋은 점은 흰토끼가 머리 묶는 장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카미나기 한나: "어차피 죽은 사람으로 공표되어버린 거, 계속 죽은 척 하고 숨어있는 건 어떨까요?"

"하?"

카미나기 한나: "패는 많을수록 좋다는 말도 있잖아요. 곧 벌어질 학급재판에서 무슨 일이 있을 지 모르니, 당신이 제 패가 되어달라는 뜻이에요."

"…밤새 미래라도 보고 온 것처럼 말하네."

카미나기 한나: "그건 아니지만 시기상 곧이라는 거죠. 마침 당신의 비보가 예비 살인자들을 자극할 좋은 떡밥이 되었을테고. 저도 꼭 학급재판에서 승리할 생각은 없지만, 플레이어 매수 같은 최악의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을 염두해서 당신이 대기하라는 거에요."

"흐음…. 흥미로운 제안 같긴 한데…. 내가 왜 거기에 응해줘야 할까?"

카미나기 한나: "첫째. 어젯밤 당신이 벌인 짐승적 만행에 대한 응보."

"큭. 그 짐승, 아직 여기 있는데 말조심해야 하지 않겠어."


양심이 찔려 괜히 한 번 으르렁거려봤지만 카미나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카미나기 한나: "둘째. 말을 곱게 잘 들으면 나중에 당신과 식사 한 번 정도는 함께해줄 수 있어요."

"오호. 그건 좀 끌리는데, 아직 약해. 하나 더 없어?"

카미나기 한나: "소원권 하나?"

"콜."



그렇게하여, 극적인 계약 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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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게임 5일차 새벽, 켄마&하루히의 벌칙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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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나기 힌나: "…피에로와 모노사메는 모습을 감췄고 다른 분들은 모두 흩어졌어요. 일단 타키모리 양과 어떻게든 수습해서 대부분 개인실로 들여보내긴 했지만…."

"……."

카미나기 한나: "…두 사람의 일은 정말로 유감이에요."


개인실로 돌아온 흰토끼는 45도로 깍듯이 허리를 숙여가며 무언가에 대한 사죄를 했다.

어째서 이 녀석이 그토록 싫어하는 내게 용서를 구하는 걸까.

'나'는 무엇에 대한 사과를 받고 있길래 아무런 대꾸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카미나기 한나: "이렇게 될 걸 알았다면 어떻게든 막았을 거에요."

"시끄러워."

카미나기 한나: "카라스 씨."

"…멧돼지와 하루히가 죽고 죽인 건 자기 자신의 과오야. 두 사람을 죽인 건 그 피에로 마스크 녀석들이고. 그 인과관계에 너 따위가 끼어들 길은 없어, 흰토끼."

카미나기 한나: "……."

"어차피 그 녀석들따윈 오래 본 사이도 아냐! 이번을 마지막으로 다시 볼 일도 없었고, 그동안 오히려 귀찮게 굴기만 했으니 한번에 혹을 두 개나 뗀 셈이지."

카미나기 한나: "……."

"……."

"……젠장. 그 재수없는 눈깔 치워. 뽑아버리고 싶으니까. 그냥, 지금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그렇게 말하면서 오히려 피하듯 고갤 돌려 두 손에 파묻는 건 내 쪽이었다.


친구가 살해당한 그 절망적인 순간의 감정을 자세히 묘사하려 너무 많은 노력을 쏟고싶진 않다.

애초에 글이라는 매체가 가진 힘이 무엇인가. 직접 모든 걸 드러내지 않으면서 독자에게 상상 노동을 전가시키는 무책임한 플랫폼이 바로 글이다. 그래서 아주 마음에 들기도 하고.

여하튼 질질 짜면서 그때 내 가슴 한켠이 어쨌니 저쨌니 하는 것보단 담백하게 빈 공간으로 남겨두는 게 내 전략이다.

무엇보다 폼이 안 살잖아. 서술자가 되자마자 너무 많은 감정 기복을 보여주게 되면. 패는 많이 아껴놓을수록 좋은 거라고, 누가 말했단 말이다.




툭 끊겨버린 대화가 재개됐을 땐 이미 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곤해서 당장에라도 널브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흰토끼도 '나'도 잠들긴커녕 막 세공한 다이아몬드처럼 날카로워진 눈동자 속에 검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검으면서도 반짝거리고 또 하염없이 투명한, 그러나 역시 검은색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와 '나' 사이에 몇 안되는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독기를 삼킬 줄 안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독에 잠겨 살고 있다는 것.



"흰토끼.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카미나기 한나: "싸워야죠.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우고 이겨내서, 살아야죠."

카미나기는 경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믿음직스럽다는 생각까진 들지 않지만 가슴을 옥죄던 게 한층 가벼워지는 느낌은 들었다.


"큭. 말은 잘 한다니까. 하지만 어떻게? 우린 가상현실 속에 갇혔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는데? 심지어 가상현실 속에서조차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에겐 상대가 안 돼. 이 좆같은 모노쿠마 뱅글인가 하는 물건 때문에."

카미나기 한나: "일단은… 일단은 살인게임을 중단하는 것부터 시작이에요. 시온 피트, 그 여자가 자신이 바라는 건 목숨이 오가는 살인게임. 어떻게든 피에로들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만큼은 막아봐야죠."

카미나기 한나: "게다가 <단간론파>를 시청하던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어요. 아무리 촬영지가 세간에 공개되지 않았더래도 경찰력의 도움이 닿을 때까지 우리가 버틸 수만 있다면… 분명 승산이 있을 거에요."

"경찰이라, 글쎄…."


경찰이 나타나서 모든 걸 해결하는 클로즈드 써클 장르는 아직까진 본 적이 없는 걸.

카미나기도 몰라서 이런 소릴 하는 건 아닐 거라 짐작해 말을 아꼈다.

암울하구만. 우리 조직원들도 검거 못하는 무능한 양반들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처지라니.


카미나기 한나: "일단은 계획 중의 하나를 말씀드렸어요. 카라스야마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아아, 뭐. 죽여버려야지."

카미나기 한나: "죽이다니, 누굴?"

"흑막."

카미나기 한나: "흑막?"

"이 살인게임의 흑막. 100% 있어, 남은 생존자들 중에서. 그게 <단간론파> 시리즈의 깨지지 않는 규칙이자 전통이니까. 열 일곱의 생존자들 중에 이 모든 사태를 계획한 녀석이 반드시 존재한다. 살인게임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부의 흑막을 잡아내는 것. '피에로'가 살인게임에 집착하는 녀석들이라면, 그 규칙을 깨뜨릴 리가 없지."

카미나기 한나: "깨지지 않는 규칙이자 전통…? 하지만 그렇게 되면…."


뭔가 떠올린 듯이 중얼거리던 카미나기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아직 확실하진 않은 가설이라며 말을 아꼈다.


카미나기 한나: "'흑막'에 대해서는 좀 더 단서를 잡으면 다시 대화하죠. 단간론파에 대해 잘 알고있는 당신에게선 얻어낼 게 많을 것 같네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선 방향성이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일단 피에로들에게 대항한다는 공동의 목표는 확인했으니까 됐어요. 그러면… 일단 여기 좀 치울까요?"

"응?"

카미나기 한나: "당신이 수혈팩으로 온통 범벅을 해놓은 탓에 몸에서 닭장 냄새가 난다는 말까지 들었다고요. 여자가 들어서 될 말이 아니잖아요. 혼자서 치우긴 어려우니까 도와줘요."

"큭, 신지 녀석이지? 데면데면한 사람한테 대뜸 그럴 말을 할만한 놈은 그 녀석밖에 없지."


'나'도 모르게 씩 웃음을 짓는 바람에, 방금까지 어떤 주제로 대화하고 있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흑막을 죽이겠다, 라니. 역시 내겐 '살인'이 '폭력'보다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개념인 것 같다. 글러먹어도 한참을 글러먹었다.

화제를 돌리는 타이밍이 예술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그 첫 걸음으로 이불을 개는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다잡기에도 딱 좋다. 위인들이 자주 하는 소리가 아닌가. 성공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이부자리를 정리해라.



"좋아. 청소하자. 대신 힘든 일은 전부 네가 해."



이부자리를 대신 정리해줄 사람이 있을 때는 또 말이 다르지만.




-




-




"……이 년은 걸레 들고 나가놓고선 돌아오질 않네. 그새 뒤지기라도 했나…."



'샤워실에 피를 묻히면 매일 씻을 때마다 기분이 불편할 거 아니에요. 번거롭더라도 밖에서 빨아올테니까 기다려요.'

라는 지극히 소녀스런 발상의 말을 남기고 사라진 흰토끼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찾으러 나선 길이었다. (카미나기는 항상 그런 식이다. 마치 스스로가 비정상인 걸 가리려는 것처럼 어떻게든 조금 더 상식적으로 보이는 방향을 택하고, 그게 오히려 더 귀찮고 뒤틀린 과정을 동반해서 결국엔 그녀가 비정상이라는 걸 증명해버린다.)


아, 이 상쾌한 공기!

낮은 층고에 어두침침한 조명, 살짝 꿉꿉하게 먼지가 날리는 복도였지만 피칠갑된 개인실에 갇혀있던 내겐 푸른 숲에서 피톤치드를 듬뿍 마시며 산책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가상현실 속에서도 해방감이란 걸 느낄 수가 있구만.

어항 속의 금붕어는 꼭 우리 생각만큼 불행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금 늘어가는 거짓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의아함을 애써 사고 저편으로 밀어버리려 애쓰며 카미나기가 향했을 법한 루트를 떠올려봤다.

피를 듬뿍 머금은 걸레를 빨 만한 공간이 어디에 있던가.

오아시스? 너무 멀다. 심야에 돌아다니긴 불안하기도 할 테고.

공공 화장실? 아니, 그 꽉 막힌 성격에 남들도 쓰는 공간을 더럽히진 않겠지.

식당 부엌? 이것도 글렀지. 씻는 것도 신경쓰인다는데 밥 먹는 건 오죽할까.

모노쿠마 분수?

오…. 가능성이 있는걸.



'죽었을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입 밖에 내뱉은 것치고선 다소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 같은 부류의 인간은 은근히 사고방식이 자기방어적이라, 인생을 통째로 뒤바꿔놓을만큼의 악재가 닥쳐오면 오히려 그 악재를 액땜 쯤으로 생각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아, 이만큼의 절망을 겪었으니 당분간 더한 일은 없겠구나…. 하고 말이다. 흔히들 회복이 빠른 타입이라고 부르는 건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말이다.

인생은 언제고 몇번이고 인간을 농락해버리고 마는 것이기에, '회복이 빠른 타입'은 '곧바로 밀려온 두 번째 파도를 이겨내지 못하는 타입'이기도 하다.

그래서 새하얀 뺨과 머리칼에 피를 묻히고 싸늘하게 쓰러져있던 카미나기를 발견했을 때에,



"…흰토끼."



'나'는 그 두 번째 파도가 찾아온 것만 같아 심장이 통째로 떨어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이.


그냥 기분만 들었다고. 기분만!





-




"…뭐야. 숨… 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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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 카미나기 한나
A] <시청자 대표> 카라스야마 류이치

B] <초고교급 보디가드> 아자부 이토리
B] <초고교급 갬블러> 아야키치 슌

C] <초고교급 JK???> 쇼코라 치에
C] <초고교급 ???> 유키야마 카무이

D] <초고교급 상담부원> 타키모리 유미코
D] <초고교급 현악부원> 토미하레 소루

E] <시청자 대표> 레이몬 하루히 DEAD
E] <초고교급 펜싱선수> 키리누키 켄마 DEAD

F] <초고교급 실험부원> 타노 나타타
F] <초고교급 대장장이> 타치바나 츠나요시

G] <초고교급 랭킹메이커> 이나모리 쿠키
G] <초고교급 사서> 이시미네 칸

H] <초고교급 동화작가> 아리스 윈터우즈
H] <시청자 대표> 후네즈 신지

I] <시청자 대표> 시무라 카리나 DEAD
I] <초고교급 변호사>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J] <초고교급 르포기자> 시가라토 유즈
J] <초고교급 연극배우> 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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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좆반인 일남충 쓰레기가 주인공?!
이라는 내용의 동인소설 추천좀

이번화는 감춰져있던 이야기와 더불어 류쨩의 출사표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새로운 서술자도 많이 사랑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