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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발언자의 신원을 표기하기 위해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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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 ch.2 일상편
<주황은 고통, 파랑은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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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어촌 漁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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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옇고, 축축하고, 짠 시체 냄새가 풍기는 그것은,


그것은 명백한 바다의 향기였다.




모노사메: "살인게임의 두 번째 무대, '어촌'을 여러분에게 소개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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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부 이토리: "어촌…? 윽…."


예고 없이 들이닥친 비릿한 바닷내에 콧볼을 꼬집어 막은 아자부 이토리가 미간을 가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날카로운 직감 만큼이나 민감한 후각을 가진 초고교급 보디가드, 아자부 이토리. 사전 정보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감각이 일반인보다 뛰어나다는 건 꼭 좋은 것만은 아닌가. 꽤나 힘겨워하는 아자부의 꼴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모노사메도 마스코트로서 최소한의 일은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아가미를 씰룩대며 아자부의 신경을 긁어댔다.


모노사메: "느푸풋, 왜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가? 두 번째 학급재판이 끝날 때까지 자네들이 활동할 무대인데. 가능한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걸세. 굳이 호텔 밖으로 나갈 것을 강요하진 않겠지만."

아자부 이토리: "엿이나 먹어."

모노사메: "느푸풋. 그런데… 카라스야마 군과 신지 군은 다소 놀란 모양이군? 왜, 기대하던 공간이 아니라 그런 건가?"

"아, 하하…. 뭐. 놀라긴 누가 놀랬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그 말대로였다.

시청자 대표의 사전정보 중엔 물론 살인게임의 맵 정보도 있었다. 그걸 이용해서 어떻게든 이점을 가져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피에로 녀석들은 유희에 도움도 되지 않는 시청자 따위의 편의를 봐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카미나기도 그걸 눈치챘는지, 하여간에 쓸모가 없다며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렸다.

거 미안하게 됐수다.



모노사메: "방금 말했듯, 어촌 지역을 탐색하고 말고는 제군들의 자유일세! 생존을 최우선시하는 자네들 몇몇으로서는 괜히 바깥에 발을 내딛었다간 오히려 살해당할 위험을 사고 말 거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니 말이야."


마치 미천한 너희들의 사정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는 그 기계음의 이질감이 소름끼치도록 기분나빴다.


모노시메: "'어촌'이 두려운 학생들을 위해 호텔 내부의 공간도 추가로 개방해두었다네! 2플로어와 3플로어엔 학생 제군들을 위한 호화로운 편의 시설, 그리고 '특별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는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으니 적어도 조사하는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될 일은 없을 걸세.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안락한 실내에서 안주하고 있진 말게나. '어촌'의 돔 속에도 자네들에게 도움이 될 힌트가 숨겨져 있고, 무엇보다 이 좁은 호텔도 언제든지 피비린내 나는 살인의 무대가 될 수 있으니 말야…. 느푸풋!"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모노사메는 스르르 흩어지는 연기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사무적이다 못해 기계적인 그 태도는 마치 살인게임에서 자신의 역할을 최소한으로 만드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노사메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좋든 싫든 저쪽에서 미끼를 던져오면 우리에겐 냉큼 무는 것밖엔 주어진 선택지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변하는 게 있을 리가 없으니까.

'힌트'나 '특별한 정보' 따위의 불분명한 말이라도, 심지어는 그게 살인게임의 흑막이 제공한 먹이라고 해도.

어항 속 금붕어 신세로선 고작해야 믿는 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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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게임 5일차/ 돔:어촌>


"고독하구만~~…."


인솔이라도 할 것처럼 나섰던 모노사메가 자취를 감추자 열 일곱의 인원은 자연스럽게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태그끼리 붙어 다니는 녀석들도 있고, 겁도 없는지 홀로 미지의 영역으로 뛰쳐들어가는 녀석들, 혹은 마음 맞는 다른 태그의 인원과 조사에 나서는 녀석도 있었다.

'나'는 어느 영역에 속하냐고 묻는다면, 누구도 같이 다녀줄 생각이 없어서 홀로 남게 된 파…라고나 할까.

흰토끼가 매정하게 나를 버리고 아야키치 슌과 아자부 아토리의 페어에게로 쫄래쫄래 따라붙은 것까지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신지 녀석까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단독행동을 선언하는 바람에 의도치도 않게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혼자 다녀도 객사하지 않을 자신은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역시 좀 심심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자부 이토리와 태그를 맺는 건데… 하는 사소한 툴툴거림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눈앞을 흐리는 안개와 짙은 어둠 속.

한 줄기 손전등과 희미하게 산란된 호텔의 불빛이 겨우 발길이 꼬이지 않도록 앞을 비추어주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비옷에는 안개가 송글송글 맺혀 땀인지 물방울인지 모를 기분나쁜 축축함의 결정체가 되는 중이었다.

찰박, 찰박. 발걸음마다 울리는 진흙, 바닷물 밟는 소리가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타고 퍼진다.

해변가도 아닌데 기본적으로 기포 낀 바닷물이 온 천지에 얇은 막처럼 깔려있는 이유가 뭘까.

...바닷바람에 날려온 물기가 응결된 것이려니 생각하고, 좀 더 손전등의 세기를 높여 주위를 크게 둘러보았다.

등대처럼 높게 솟은 모노쿠마 호텔(이젠 모노사메 호텔이라 불러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은 마치 초콜렛 케이크에 홀연히 꽂힌 촛불 하나처럼 고고하게 붉은 네온빛을 발하고 있다.

길을 따라 꽤 오래 걸어온 것 같은데도 저 호텔의 존재감은 옅어지질 않는다. 안개 탓에 거리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리라.

하지만 호텔만이 어둑어둑한 어촌 돔의 유일한 광원은 아니었다.

어촌에는 어촌답게 '등대'라는 듬직한 발광체가 존재했다.

모노쿠마 호텔이 퇴폐적이고 은은한 홍등가의 조명 같았다면 저 멀리서 쏟아지는 등대불은 한결 선명하지만 다소 좁은 범위를 비추는 손전등 같았다.

'나'는 그 느릿느릿한 빛의 움직임을 첫 표적으로 삼아 물에 흠뻑 젖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의 밝음, 흐릿함 속의 선명함이라는 건 대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력을 가지고있기 마련이니까.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등대와 호텔. 두 개의 조명 사이에서 하염없이 길을 헤메이다 보니 어촌 돔의 구조가 대충 머릿속에 들어왔다.

등대와 호텔은 서로 돔의 정 반대편에 위치했다. 각각 지름의 1/4, 3/4 지점 쯤 될까. 정확한 거리는 파악하기 어려우니 대략 그 쯤으로 생각하자.

호텔에서 등대까지의 구역은, 워낙에 지형이 어지러워서 정확히 기술할 수는 없지만 쇄락한 어촌을 한층 끔찍하게 재해석해 창조한 풍경이었다.

좁고 울퉁불퉁한 골목길이 찢어진 그물처럼 엮여져있어 고개를 빼고 등대와 호텔을 수시로 확인하지 않으면 방향감을 잃기 딱 좋았다.

이따금씩 정체를 알 수 없는 생선 머리 인간의 조각이나 벽화 따위가 등장해 그것들을 지표 삼아서 나중에서야 겨우 길을 외울 수 있었다.

한때 누군가 살았던 것처럼 내부, 외부가 더러운 작은 가옥들이 썩어가는 기둥을 겨우 붙잡은 채 견디고 있다.

난데없이 바닥이 푹 꺼진 절벽이 있어 끊어질 것만 같은 구름다리를 건너야만 했고, 우물에선 썩은내가 나는 데다 그 안쪽에서 길고 매끈한 형상의 생명체들이 서로 엉켜 뒹굴고 있는 불가사의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어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썩은 생선들이 매달린 새끼줄, 그 위에서 불길한 붉은 눈을 반짝이며 오랜만의 손님들을 감시하는 까마귀들.

아마 죽어있는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리라.

등대의 뒤쪽으로는 안개낀 바다가 펼쳐져있다. 끝없이 육지로 밀려들어오는 안개의 근원지가 아마 그곳으로 짐작되는데, 돔 상의 등대와 호텔의 정확한 위치를 확신할 수 없는 이유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바다 때문이었다.

해변에서 등대로 올라가는 길엔 넓은 뻘이 펼쳐져있다. 크고 작은 난파선의 잔해들, 온갖 쓰레기가 엉켜있는 폐어망, 폐사한 조개의 무수한 껍질 따위가 푸른 달빛을 받아 소름돋게 희었다. 역병에 걸린 병자의 꼴을 표현한 새로운 장르의 예술같았다.

한 때는 진주색이었던 흔적이 남아있는 더러운 흙빛의 등대는 뻘에서 조금 떨어진 부둣가에 홀로 우뚝 서있었다.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이곳저곳이 금 가고 부식되어있다.

굳게 닫힌 문엔 쇠사슬이 휘감긴데다 자물쇠가 채워져있다. 5자리 비밀번호식이 하나, 열쇠식이 하나. 둘 중 하나만 해제해도 열리는 식인 것 같지만…. 별다른 힌트나 열쇠가 숨겨져있을 법한 곳은 보이지 않아 금세 포기하고 돌아섰다. (다섯 글자 비밀번호라니 혹시? 라고 생각한 당신. 혹시나 싶어 시도해봤지만 역시 11037은 정답이 아니었다.)

죽은 배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뻘과는 달리 부둣가엔 멀쩡한 배들이 몇 척 남아있었다.

어선, 구겨넣으면 다섯 명 정도 탈 수 있을 듯한 작은 조각배, 꽤 덩치가 있고 크레인 같은 장치도 달려있는 정체불명의 배가 하나.

하지만 그따위 물건에 목숨을 맡기고 바다로 나가 볼 용기는 없었다. 배가 뒤집히거나 돔의 벽에 부딪히기라도 하는 날엔 시체도 못 찾고 그대로 영영 실종되지 않을까. 이미 한 번 죽은 척을 한 입장으로선 누군가 시체를 찾아주길 바라는 것도 무리였다.

냉동 창고, 어시장(물론 폐쇄된) 따위의 지극히 어촌스런 시설들이 부둣가 주위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수백, 수천의 딱딱한 냉동 물고기들 말곤 더 볼 것도 없었다. 얼마나 딱딱하게 얼었는지 고등어 꼬리를 잡고 휘두르면 충분히 흉기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변가가 절벽으로 뚝 끊겨있어 호텔까지 육지를 빙그르르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배를 타지 않는 이상 그 복잡한 어촌가를 지나지 않고선 등대에서 호텔을 오가는 건 불가능한 셈이었다.

어쨌건 다시 복잡하고 복잡한 어촌가를 쭉 통과해 돔의 반대편을 살펴보자.

등대의 뒷편이 안개낀 바다였다면 호텔 뒷편엔 어촌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또 그래서 더 꺼림칙한 시설들이 남아있었다.

그 정체는 20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에나 나올 법한 서커스단의 텐트들.

스위치를 찾을 수만 있다면 전기도 들어오는데다 다른 모든 장소와는 달리 꽤 깔끔한 편이었다.

내부 창고엔 불이 붙는 훌라후프, 채찍, 폭죽 등 서커스를 연상시키는 소품들이 모여있었고, 분명 사자나 곰 따윌 가둬두었을 것 같은 큼지막한 우리, 원숭이나 고릴라, 혹은 인간처럼 비교적 작은 동물이 들어갈 답답한 크기의 철창도 있었다.

징조 하나하나가 불길하기 짝이 없다. 살인을 막겠다 입장이라면 이곳에 있는 물건을 죄다 가져다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을 정도였다.

첫 번째 어촌 탐색은 이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힌트도 특별한 정보도 무엇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단언할 수 있었다.

끔찍할만큼 불길한 마을이고, 인정하기 싫지만, 살인이 일어나기에는 정말로 딱 알맞은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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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하고 지친 몸으로 다소 외롭게 두번째 끼니를 떼웠다. 메뉴는 경양식. 성미에 차진 않지만 이빨이 나갈 듯 딱딱한 빵보다야 먹을만 했다.

카미나기 대신에 식당 NPC '희망 쨩'이 말상대를 해주어서 조금 기뻤다. 놀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건 좀 심심하지만.

잠깐만. 그러고보니….

어딘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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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나기 한나: "어머. 비 맞은 까마귀 꼴이네요. 감기 걸리겠어요."

"감기에 걸렸으면 좋겠다는 뜻이지, 그거?"

카미나기 한나: "후후. 똑똑하기도 하시지."


비 한방울 맞지 않았는데도 걸음마다 뚝뚝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개인실에 들어서자 카미나기는 이미 뽀송뽀송하게 씻기까지 한 채였다.

하긴 동료들과 각각 구역을 나눠 조사했을테니 시간이 절감됐겠지. 괜스레 약이 올라 고의로 옷을 털어 물방울을 튀겼지만 속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는 게 또 얄미웠다.


카미나기 한나: "어땠어요?"

"분위기는 으스스하면서 그다지 특별한 건 없던데. 수상한 건 등대와 서커스 정도. 그러는 너는, 흰토끼?"

카미나기 한나: "글쎄요. 수상하고 말고를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서…. 하지만 분위기가 묘해요."

"분위기?"

카미나기 한나: "네. 분위기가…."



카미나기는 잠시 눈을 다른 곳에 두며 말을 골랐다.



카미나기 한나: "모든 것이 철저하게 죽어있는데 그래서 오히려 생동감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알아듣게 설명해, 흰토끼."

카미나기 한나: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살충제를 맞고 몸을 비틀다 죽어가는 커다란 지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고양감과 성적인 흥분? 어라. 그런 적 없어요?"

"있어도 없어!"



…범재가 이해하기엔 너무 심오한 설명이다.

죽어있는데 생동감이 느껴진다니. 대체 저 어촌의 어디에서 그런 공기가 풍긴다는 걸까?

시들어 죽어있는



카미나기 한나: "하아, 그나저나 걱정이에요. 아자부 양도 그렇고 슌도 그렇고,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식당에서 봤을 땐 둘 다 멀쩡해 보이던데."

카미나기 한나: "당신이 뭘 알아요."

"야박하네. 이쪽은 하루아침에 친구 두 명이 살해당했는데, 오히려 그런 발언은 실례 아닌가?"

카미나기 한나: "그치만 당신은 이제 별 걱정 안되는걸요. 가슴 만지려고 한 것 보고 아, 다 나았구나, 싶어서."

"윽…. 그나저나 정말로 말짱해보인다고, 그 둘. 다른 누구도 아니고 초고교급 도박사에 초고교급 보디가드잖아. 괜히 걱정하는 거 아냐? 친구라곤 그 둘밖에 없지? 찐따 티를 너무 내는데? 아니, 아자부 이토리하곤 친구사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

카미나기 한나: "까마귀 씨. 당신 말대로 제가 친구는 별로 없지만,"


'없지만' 부분에 특히 힘을 실어 말하는 게 우스웠다.

하핫. 찐따녀석. 역시 이 몸의 찐따 감지 레이더는 정확하다니까.


카미나기 한나: "그래도 사람 마음을 읽어내는 데엔 쌓아온 내공이 다르죠. 제가 볼 때 아자부 양은 이미 위태위태해요. 유키야마 군과 난투극을 벌인 것도 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거라고요.

그리고 슌은…. 그냥 어딘가 이상해요. 제가 아는 슌이라면 분명…."

"분명?"


흐려진 말끝은 아무리 기다려도 맺어질 것 같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리며 흘리듯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겨우 귓바퀴에 걸렸다.



카미나기 한나: "분명… 그런 반응은 하지 않을텐데."


그 말소리는 카미나기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흐릿하고 또 자신감 없어서, 그 방 안에 제 3자가 있었다면 카미나기의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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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에 젖은 옷가지를 갈아입고 나오자 이번만큼은 흰토끼가 호텔 구역 탐사를 함께하기 위해 기다려주고 있었다.

…아니, 기다렸다기보단 그쪽도 바람맞아서 별 수 없이 남았다고 하는 게 옳겠다.

구태여 캐묻지 않아도 뻔할 뻔자다. 이럴 때에 보면 카미나기의 포커페이스는 뭣하러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한편 버림받은 카미나기가 적적한 기분을 달래기에 딱 좋은 장소가 2F에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동안 아끼거나 벌어놓은 크레딧을 마음껏 써먹을 수 있는 상점가였다.



카미나기 한나: "오호. 오호. 오호오호."

"…쯧. 마네킹에서 눈을 못 떼는구만. 그냥 여기 눌러 살지 그래?"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펼쳐진 깔끔하고 세련된 외견의 2F는 아주 작게 축소된 백화점을 연상시켰다.

옷가게, 럭셔리, 소형 가구점, 작은 시네마에 베가스에 있었던 그 주점까지.

좁아터진 호텔 치고 갖출 건 다 갖췄다. 적어도 한창 외모에 신경 쓸 10대 여자애를 딱 붙들어놓을 정도의 물건들은 충분히.


카미나기 한나: "조용히 좀 하세요, 카라스 씨. 카지노와 쇼핑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구요. "



진열대 속 팔찌를 하나하나 훑어보며 흰토끼가 일렀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이미지지만 흰토끼는 꽤 소비욕이 높은 편에 속했다. 굳이 이나모리 쿠키처럼 줄을 세우자면 여성진 중에서는 두, 세째 정도 될까?

군것질거리, 악세사리, 파티 복장, 쓸모없는 장식품 등.

거의 24시간을 카지노 업무에 붙들려 일상을 보내다 잠시 숨돌릴 틈이 생기면 그걸 전부 돈 쓰는 데에 몰두하는 셈이다.



카미나기 한나: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베가스에선 예쁜 옷을 입어야 하는 게 규칙이에요."

"이제 베가스가 아니라 어촌이거든…. 그리고 그래봐야 가상현실이지. 게임 아이템 같은 거야. 쇼핑이 아니라 룩딸이라고 부르는 게 맞아."

카미나기 한나: "좀 조용히… 이 팔찌 어때요? 좀 어울리나?"

"아… 응. 아주 예쁘네."

카미나기 한나: "앗, 그럼 이건 절대로 사면 안되겠네요."

"……."


우스꽝스런 팔찌를 차고다니게 하려는 속셈의 거짓말이었지만 오히려 상처를 입어버린 건 내 쪽이었다.


"그나저나 쓸 크레딧은 있고? 크레딧 배급량이 물건 가격에 비해 적어도 너무 적지 않아?"

카미나기 한나: "가만히 누워서 떨어지는 크레딧만 받아먹으려고 하면 그렇겠죠? 저처럼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벌어야죠."


카미나기는 복잡한 트럼프 무늬가 그려진 검은 실크스카프를 집어들며 대꾸했다.

묶은 머리를 풀고 새 스카프로 그 특유의 토끼귀 모양을 만들자 이번엔 정말로 꽤 그럴듯해 보여 오, 하고 작게 감탄이 나왔다.


"와. 진짜 못생겼다. 효수해서 박제로 걸어놓고 싶어."

카미나기 한나: "그럼 이걸로 정해졌네요. 계산하고 올게요."


다루는 요령을 조금은 파악한 것 같다. '나'의 말이 거짓말이란걸 카미나기가 알고서 반응하는 건지 모르는 건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대 이곳에 계산대 같은 게 있던가, 하고 주위를 둘러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NPC 희망 쨩이 싱긋 웃으며 자신과 닮은 여자애의 계산을 도와주고 있었다.

모노쿠마가 사라지고서도 여전히 호텔의 NPC로 톡톡히 활약해주고 있는 희망 쨩.

카미나기나 희망 쨩이나… 서로 닮았다는 자각은 있을까?

....



"기분 탓이겠지."



-




2F, 통칭 백화점 층에서 복작거리던 녀석들은 한 둘이 아니지만 일단 그 녀석들과 부딪히고 떠들었던 내용은 대략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번 기록은 새로 개방된 지역들을 소개하는 것에 최대한 초점을 맞추고자 하니까.

살인게임의 플레이어들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는 이어질 이야기에서 따로 분량을 할애해서 하나 하나 풀고자 한다. '나'를 믿고 지금은 가만히 따라와주길.


양해를 구해서까지 탐사에 대한 얘길 계속하고자 하는 건 다름아닌 3F의 중요성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은 3F에 발을 들이자마자 불현듯 나타난 모노사메의 몫이었다.


모노사메: "느푸풋, 3 플로어에 온 제군들을 환영하네! 하지만 그 전에. 어떤가, 어촌 구경은 할 만 했나?"

"아, 촉촉하니 피부가 좋아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던데. 하루 세 번 정도 알몸으로 산책해도 될 것 같아."

카미나기 한나: "……."


대략 경멸의 눈빛.


모노사메: "흐음. 그런가? 기대했던 반응은 아닌데. 뭐 상관 없겠지."

모노사메: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네. 제군, 제군은 제군의 초고교급 재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나' 따위에게 이렇다할 재능은 없었기에 모노사메 녀석은 말투를 바꾸어 카미나기 개인만을 지칭했다. 딱히 범재의 열등감을 배려하는 건 아니겠지만, 카미나기는 뽐내는 기색 없이 약간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카미나기 한나: "글쎄요. 질문이 너무 두루뭉술하네요. 감상을 말하라는 건가요? 애초에 초고교급 재능이라는 명칭을 이 호텔에 들어와서 처음 들었는데. 그 기준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구요."

모노사메: "무엇이라도 상관없네. 말 그대로 자네의 생각이 듣고 싶을 뿐이니까. 초고교급 재능.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주게."

카미나기 한나: "…팔과 다리…?"


직감을 있는 그대로 말하라는 요청에 응하기 위해선지 평소 꽤 고민하며 말을 하는 편인 카미나기의 입에서 선뜻 응답이 튀어나왔다.

모노사메가 해설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설명을 덧붙이는 모습에서 지독할만큼 타인에게 친절하려하는 카미나기의 천성이 살짝 엿보였다.


카미나기 한나: "왜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태어났고, 매우 편리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없어졌을 때 대비하기가 어렵다고나 할까요. …뱉고 나서 생각하니 끔찍한 비유네요. 정정하고 싶어요."

모노사메: "흐음. 팔과 다리라…. 팔과 다리…."


모노사메는 씨익 상어 이빨을 드러내며 기분나쁜 웃음을 지었지만,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모노사메: "과연 훌륭한 대답일세! 과연,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의 눈에 재능 없는 시청자 따위는 팔다리가 없는 달마처럼 가여운 꼴로 비친다는 뜻이구먼. 물론, 물론이지. 재능 없이 태어난 영장류의 삶 따위, 그저 생식을 위해 바둥거리는 애잔한 유기물의 일대기일 뿐이니까."

카미나기 한나: "어머. 마음대로 해석하지 말아주실래요, 기계 주제에."

모노사메: "느푸풋. 지금은 피에로들의 말을 전하고 있는 중이라네."


모노사메의 눈빛이, 그리고 '나'와 카미나기의 눈빛이 아주 한순간 반짝였다.

피에로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니, 일일히 모습을 비추기가 곤란해 아예 모노사메에게 전령 역할을 시키는 건가.


모노사메: "너무 놀라거나 경계하진 말게나. 피에로들이 바라는 건 그저 즐거운 엔터테인먼트니까. 자네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피에로들에게 그 가상현실을 벗어날 수 없듯이, 피에로들도 쇼가 너무 재미없게 흘러가지만 않는다면 자네들에게 직접 손대지는 않을 거야.

그보단 좋은 대답을 들었으니 보답을 해주겠네. 이 3F에는 거주시설도 아니고 편의시설도 아닌, 이전까지의 층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별한 시설이 자리하고 있다네.

그 이름도 위대한, '연구 교실'이지."

카미나기 한나: "연구 교실…? 뭘 연구한다는 거죠?"

모노사메: "뭐긴 뭐겠나? 초고교급 재능이지!"


모노사메는 지느러미를 길게 늘려 나름대로의 팔짱을 끼고 당돌하게 말했다.


모노사메: "연구 교실은 초고교급 학생 개개인을 위해 디자인 된, 초고교급 재능을 갈고닦기 위해 마련된 장소라네!

이미 각자의 취향에 맞게 설계된 개인실이 있지만, 연구 교실은 좀 더 본격적으로 재능에 관련된 전문 설비, 학술적 자료, 심지어는 초고교급 학생 그 개인에 대한 분석 정보까지 갖춰져있지.

해당 초고교급 학생이 아니더라도 그 연구 교실의 주인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다면 충분히 들릴 가치가 있는 곳이라네. 꼭 연구나 조사 목적이 아니더라도 휴게실로서도 괜찮은 곳이고.

아직 모든 학생들의 연구 교실이 준비되진 않았지만, '몇 번의 학급재판'을 더 거치고 새로운 층들이 개방되면 모든 연구 교실을 방문할 수 있을 걸세! 그럼 더 자세한 내용은 직접 알아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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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F에서 개방된 연구교실은 총 넷.

초고교급 학생의 수를 헤아려보면 1/4에 해당하는 숫자다. 그렇게 크다고 보기도 어렵고, 너무 적다기엔 또 후하다.

개방된 연구교실의 주인들은 다음과 같았다.

초고교급 보디가드 아자부 이토리.

초고교급 상담부원 타키모리 유미코.

초고교급 현악부원(바이올리니스트) 토미하레 소루.

그리고….



쇼코라 치에: "아아아악! 이게 뭐야아아앗!!!"

카미나기 한나: "…이게 무슨 소리죠?"


…'자칭' 초고교급 JK.

푸른 머리를 양갈래로 배배 땋은 초고교급 파티시에, 쇼코라 치에였다.



쇼코라 치에: "치에는 초고교급 JK라구!! 고작 파티시에 따위가 아니란 말야!!!"

유키야마 카무이: "윽. 좀 진정해라, 꼬맹이. 귀가 울린다."

쇼코라 치에: "취소해! 취소해줘 이거!! 취소해애액!!!!"

"……텍스트로 옮겨도 시끄러움이 느껴질 만큼 시끄럽군."



의문의 괴성을 쫓아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연구교실 앞에 널브러져서 땡깡을 부리고 있는 그 개초딩년과 입을 빼쭉거리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하는 유키야마 카무이를 찾아볼 수 있었다.

장난감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와 주머니 사정이 곤란한 부모를 보는 느낌이랄까. 이 페어는 파트너라기보단 나이차이 심한 남매, 아이와 보호자 같은 느낌이 든다.

재능을 잊어버린 소년과 재능을 부정하는 소녀라는 건, 어찌보면 참으로 기묘한 조합이다.


쇼코라 치에: "이, 이건 사기야! 잘못됐어! 쇼코라는 절대로… 절대로…!"

"저어얼대로 초고교급 파티시에잖냐. 문자를 떼는 것보다 먼저 초코머핀을 구워냈다는 희대의 천재 제과장."

쇼코라 치에: "하… 하아? 하아아아??!?!"


뭘 놀랐다는 눈치인가. 시청자 대표가 그 정도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정말로 자기 재능이 초고교급 JK 같은 멍청한 이름일거라 생각한 걸까?



쇼코라 치에: "너, 너, 너는 뭐야! 이 말린 오징어포처럼 생긴 게! 왜 남의 흑역사를 알고있는… 윽."


말린 데다가 오징어이고 심지어 바싹 짓눌리기까지 한 거냐.


쇼코라 치에: "이, 이딴 건 치에땅의 연구교실이 아니야! 그, 그래…. 이건 카무이 오라비의 연구교실이라고! 카무이 오라비의 숨겨진 초고교급 재능, 그게 실은 초고교급 파티시에였던 거야!"

유키야마 카무이: "…! 그런 거였나!!"

"그런 거긴 뭐가 그런 거냐!"

유키야마 카무이: "…그런데 파티시에가 뭐냐?"

"……."

쇼코라 치에: "……."

"알겠으니까 그만 찡찡대고 길이나 좀 비키셔. 초고교급 파티시에의 연구교실엔 그래도 꽤 맛난 먹거리가 있겠지. 요즘 끼니가 부실해서 배 고프단 말야."

쇼코라 치에: "아앗! 남의 연구교실을 식량창고 취급하지 말란 말야!"

"앗. 인정했다."

쇼코라 치에: "아, 아니야! 그러니까 여긴 카무이 오라비의 연구교실이래도!! 카무이 오라비의 연구교실은 소중하니까!"

유카야마 카무이: "…그런데 연구교실이 뭐냐?"

"아~ 유키야마는 모르는 게 많구나. 걱정 마. 알려줄테니. 연구교실이란 건… 화장실 같은 거야. 들어가서 바지를 벗고 괄약근에 힘을 주면 돼. 간단하지?"

쇼코라 치에: "어이! 남의 연구교실을 대변칸으로 만드려고 하지 말란 말야!!"

"wwwwwwwwwwwww"

유키야마 카무이: "……."





카미나기 한나: "……."

카미나기 한나: "아……. 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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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 카미나기 한나
A] <시청자 대표> 카라스야마 류이치

B] <초고교급 보디가드> 아자부 이토리
B] <초고교급 갬블러> 아야키치 슌

C] <초고교급 JK???> 쇼코라 치에
C] <초고교급 ???> 유키야마 카무이

D] <초고교급 상담부원> 타키모리 유미코
D] <초고교급 현악부원> 토미하레 소루

E] <시청자 대표> 레이몬 하루히 DEAD
E] <초고교급 펜싱선수> 키리누키 켄마 DEAD

F] <초고교급 실험부원> 타노 나타타
F] <초고교급 대장장이> 타치바나 츠나요시

G] <초고교급 랭킹메이커> 이나모리 쿠키
G] <초고교급 사서> 이시미네 칸

H] <초고교급 동화작가> 아리스 윈터우즈
H] <시청자 대표> 후네즈 신지

I] <시청자 대표> 시무라 카리나 DEAD
I] <초고교급 변호사>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J] <초고교급 르포기자> 시가라토 유즈
J] <초고교급 연극배우> 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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