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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발언자의 신원을 표기하기 위해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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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 ch.2 일상편
<주황은 고통, 파랑은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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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우리 초고교급을 소개합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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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여러분의 러블리 큐티 섹시 서술자, 시청자 대표 카라스아마 류이치입니다!

다소 갑작스럽지만 질문 하나를 던져볼게.

'당신'은 '단간론파'라는 장르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해?

탄탄하고 흥미로운 추리?

음, 글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핵심이라고 보긴 어렵지. 이따금씩 엉성한 구석이 드러나기도 하고.

선정성?

으음. 어느 정도 맞는 말이야. 살인이라는 소재에 하드코어한 연출, 그리고 약간의 성적 수위까지.... 하지만 역시 원하는 답은 아니야.

세계관?

……장난해?

휴. 곧바로 알아맞출 거라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정답은 말이다, '캐빨'이다.

단간론파는 추리물도 아니고 료나물도 아니고 스토리물도 아닌 캐빨물이란 말이다. 캐. 빨. 물.

잘생기고 예쁘고 귀엽고 카리스마 있는 개성 과다 캐릭터들이 죽거나 죽이거나 절망하거나 극복하는 모습에 열광한다. 그게 바로 단간론파의 기본적인 세일즈포인트다.

등장인믈 16명이 죄다 성게머리 아저씨였으면 애초에 조명받을 일도 없이 사라졌겠지.

이걸 이해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단간론파의 팬이라고 할 수 없어. 알겠나?



자, 그럼 상기한 이유로 '천공호텔 단간론파'도 이번 화부터는 진행 방식을 확 바꿔보도록 하겠다.

'나'나 카미나기의 시점에 갇혀서 일직선적인 서술을 하는 것보다는, 천공 모노쿠마 호텔의 거주자 한 명 한 명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다뤄보자는 거지.

꼭 텍스트의 형식을 따른다해서 시간이라는 틀에 얽매일 필욘 없는 거잖아?

조금 더 시야를 넓혀서, 지금껏 네놈들에게 제대로 들려주지 못한 다른 녀석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이거지. 시청자 대표로서의 정보도 조금 풀고.



자, 그럼 바로 첫번째 타자에 대한 썰을 좀 풀어볼까.

지난화에 끔찍할만큼 땡깡을 피워댔던 파티시에 꼬맹이부터 시작해보자.

쇼코라 치에, 그 빌어먹을 꼬맹이.

쪼깬한 키에 주렁주렁 매단 악세사리, 발에 밟히진 않을까 싶어 거슬리기 짝이 없는 새파란 양갈래 땋은머리의 소유자.

대화의 대부분을 애교나 아앙떨기로 메꾸는 편이며, 겁은 더럽게 많지만 회복이 빠르고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세운다.

이미 말했다시피 재능은 초고교급 파티시에.

케이크나 도넛, 초콜릿, 캔디 등등 온갖 종류를 아우르는 천상의 디저트를 만들어내는 세대 최고의 과자 장인으로서, 꼬맹이가 진심을 다 해 구워낸 브라우니를 한 입 물면 한나절 동안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말까지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쇼코라 치에가 자신의 재능을 매몰차게 부정하고, 스스로를 초고교급 JK로 지칭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쇼코라 치에: "내가 '고작' 초고교급 파티시에 따위일 리가 없잖아-!! 치에는 모든 분야 만능의 초-엘리트 큐티섹시 JK 님이라고!!"



…그렇다.

그냥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후해도 너무 후했을 뿐이다.



'키보가미네 사가'에서나 '천공호텔 단간론파'에서나, '초고교급'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학생들은 자기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이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재능에 프라이드를 느끼고.

누군가는 자신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재능을 탐탁찮게 여기거나 귀찮게 생각하며,

또 어느 누군가는 타인의 재능을 시기하거나, 선망한다.

하지만… 쇼코라 치에는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쇼코라 치에는 스무 명의 참가자 중에서 그나마 가장 평범에 가까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평범하게 사랑을 쏟는 부모, 그 사랑을 독식하는 외동딸로 태어났고, 그럭저럭 재능을 가꾸기에 충분한 경제력까지 갖춰져 있었다. 초고교급 파티시에가 성장하기엔 딱 적절한 텃밭이라 할 수 있다.

딱 한가지 문제점을 꼽자면, 쇼코라 치에의 부모가 딸의 이름을 '쇼콜라티에'라고 지어버렸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자신들의 딸을 파티시에로 키울 생각이었다는 의미다.

쇼코라 치에의 아버지는 성이 쇼코라가 아니었다. 어머니 쪽도 마찬가지다.

타카 신지와 유사 미나미. 지나치게 평범하고 억눌린 인생을 살았던 그 남녀는 '결혼하면 꼭 쇼코라 치에라는 이름의 딸을 낳아서 빵집을 경영하는 파티시에로 기르고 싶다'라는 기이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고, 혼약을 맺고 나서 자신들의 성을 '쇼코라'로 고친 뒤 딸의 이름을 '치에'라고 짓는 기행을 벌였다.

왜, 인터넷에 보면 꼭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딸 이름을 애니 캐릭터로 짓는다던지, 아들 이름을 지옥의 마왕처럼 짓는다던지.


여기서 더더욱 웃긴 건 '쇼콜라티에'로 이름을 지은 딸내미가 정말 우연하게도 '초고교급 파티시에'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점이 아닐까?

딸의 이름을 쇼코라 치에로 지었는데, 낳고보니 정말로 디저트의 천재라니. 이 무슨 천운인가?

(만)세 살 배기 딸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브라우니 베이크를 구워냈을 때, 쇼코라 치에의 부모는 정말 말로 못할 희열, 혹은 어떤 운명적인 계시와 같은 소름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쇼코라 부부의 '쇼코라 치에 만들기'는 딸의 천부적인 재능에 힘입어 나날이 이어져갔고, 아이에 대한 부모의 집착과 열의도 날이 갈수록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났다.

어린 쇼코라 치에 또한 자신의 우월함을 느낄 수 있는데다 부모의 총애까지 얻어낼 수 있는 그 오묘한 생활을 전혀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춘기'가 오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키가 자라고 몸이 여성스러워지기 시작한 어느 날부터, 쇼코라 치에는 자기 자신이 이대로 머물기엔 너무 아깝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앞치마와 주방 모자를 벗고 예쁜 옷을 입고 싶었다.

단 것 뿐 아니라 맵고 짜고 쓴 음식도 만들어보고 싶었다.

자기소개서에 취미를 공란으로 두고싶지 않았다. 특기에 제과제빵 이외에 다른 말을 적고 싶었다.

늙다리 부호들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디저트를 내놓는 것보단, 좀 더 많은 대중들과 또래들에게 듬뿍 귀여움과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할 수 있다. 우주에서 가장 귀여운 미소녀인 자신이라면 할 수 있다!

YES I CAN! PLUS ULTRA!


쇼코라 치에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은 것이다.

쇼코라 치에가 가장 사랑하는 건 자기 자신. 초고교급 파티셰의 재능 따위 그 완벽한 자신을 이루는 수없이 많은 보석 중 하나일 뿐, 결코 집착하거나 내세울 게 되지 못한다는 게 그녀의 굳은 신념이다.



…라는 스토리를 시청자 대표의 사전 정보로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초고교급 파티시에의 연구 교실'을 맞닥뜨렸을 때 오만상을 찌푸리며 난리를 피운 것도 사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는 되지만 용서는 안 된다.

'시끄러운 땅딸보'라는 것엔 이미 질릴 만큼 시달려왔기 때문에, '나'는 별 거리낌 없이 냉정하게 녀석의 연구교실을 싹싹 뒤져 수색했다.

그 연구교실은 훌륭한 베이커리라고 고쳐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만큼 완벽한 시설을 자랑했다.

피자라도 구울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화덕, 반죽의 발효를 돕는 기계, 온갖 환상적인 식재료들이 가득한 냉장고….


…결국 완성된 요리는 없었지만, 배가 고프니 적당히 날로 먹을 수 있는 식재들을 주워먹는 수밖엔 없었다.



쇼코라 치에: "왜 남의 연구교실에서 음식을 훔쳐먹는 거야!! 이 무지렁이 날백수가!!"

"아니, 여긴 치에 쨩 연구교실 아니라면서?"

유키야마 카무이: "그만둬라. 이곳은 내 연구교실이다, 카라스야마 류식이…!"

"류식이는 또 누구야…? 어떻게 되어먹은 지능이냐?!"



쇼코라 치에의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역시 그녀의 미스테리한 파트너. 유키야마 카무이다.

검은 옷의 사나이. 방송국에서 시청자 대표에게조차 그 정체를 감추려고 한 남자. 그리고 어째선지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시청자 대표를 제외하고선 '초고교급의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은 유일한 녀석이다.

늘상 모른다, 모른다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는 녀석의 가장 큰 특징은, 아주 얄밉게도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이다.

자신의 이름만을 겨우 알고있을 뿐인 그 놈은 일상편에서나 비일상편에서나 도움이 될 말이라곤 한 마디도 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처음엔 기억 소거의 부작용, 혹은 과묵한 컨셉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날이 갈수록 생각이 변해갔다.



이 녀석, 혹시 그냥 아무것도 없는 바보가 아닐까? 하고.


방송국이 준비한 히든카드. 혹은 초고교급 사냥꾼. 혹은 아무것도 아닌 바보.

녀석의 정체에 대해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게 없는 만큼, 유키야마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저런 뒷설정보단 녀석과 쇼코라의 행보에 좀 더 시선을 맞추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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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쇼코라 치에는 살인게임이 시작하고서부터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히려 목소리가 커지고 웃음짓는 타입인 그녀는 다짜고짜 기억의 필름이 절단당하고 낯선 공간에 떨어진 순간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붙잡고 애써 사람을 찾아 웃음지었다.

그레이트 에구이사루가 아자부 이토리를 짓밟아버렸을 때에도, 시무라가 키리누키 켄마에게 심장을 꿰뚫렸을 때에도, 학급재판에서 키리누키 켄마와 하루히가 처형당하고 시무라가 멱을 따였을 때에도 쇼코라 치에는 그 누구보다 겁에 질려서 비명을 질렀었다.

하지만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꼬맹이는 다시 웃음지었고, 그 웃음과 그 눈동자와 그 입꼬리와 그 목소리는 살인게임 초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더 가식적이고 불안정하게 뒤틀려있었다.

여전히 아앙을 떨고, 애교를 부리고, 간혹 연구교실을 들러 디저트를 만들어 나눠주는 등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 사교적인 모습마저 보였지만 그건 스스로의 상태를 애써 부정하는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카미나기 한나: "카라스 씨. 쇼코라 양, 아무래도 뭔가가…"

"그 정도는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가 아니래도 눈치챌 수 있어. 뭐랄까, 겁에 질리긴 했는데 그냥 겁먹은 게 아니라…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표정 같던 걸?"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 라는 건 물론 같잖은 직감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저 목숨을 위협당하고, 기억이 온전치 못한 이 상황 자체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미나기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는지, '쇼코라 양과 나눴던 첫 대화가 신경쓰인다'며 말을 흘렸다. '나'는 그 의미를 알 수도 없었고,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았다면 뭐가 바뀌었을까. 아니, 그랬을 것 같지도 않고.


쇼코라 치에와 유키야마 카무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붙어다녔는데, 처음엔 도망다니는 유키야마 카무이를 쇼코라 치에가 졸졸 따라다니는 식이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유키야마가 도망을 포기하고 자연스럽게 걸음을 맞추게 되었다.

겁에 질린 쇼코라가 유키야마를 의지하는 만큼 유키야마 또한 쇼코라를 의지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 무뚝뚝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놈이 누군갈 의지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유키야마도 일단은 인간이고 불안함을 느낀다.

다만 살인게임이나 피에로들의 위협에 불안해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무런 갈피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불안을 느꼈다.

다른 녀석들이 유키야마를 경계하는 만큼 유키야마도 스스로를 경계했다.



기억을 찾아야한다.

자신이 흑막이나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기억을 되찾아야한다.

아니, 자신이 위험하지 않다고 확신할 수는 있는가.

기억을 되찾는 게 오히려 다른 녀석들에게 위해가 되진 않을까. 그렇다면 기억을 되찾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니, 애초에 기억을 찾을 방법 따위가 있긴 한 걸까….


이런 고민들에 잔뜩 휩싸여있던 유키야마에게 쇼코라가 주는 솔루션은 참 간결하고도 그녀다웠다.


쇼코라 치에: "그러니까, 기억 같은 게 없어도 오라비는 계속 그렇게 잘생기기만 하라니까? 뭘 그렇게 고민해?"

유키야마 카무이: "……."

쇼코라 치에: "고민한다고 해결책이 나올 만큼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유키야마 카무이: "……."

쇼코라 치에: "오라비나 나나 똑같아~ 머리 나쁜 사람들은 머리 나쁜대로 순응하면서 살면 되는 거라구. 아무리 노력해봤자 성장이 끝난 팔이나 다리는 길어지지 않는 것처럼~ 고민은 은행원이나 인공지능한테 맡기고! 그냥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 말이야."


그 끔찍하리만큼 무책임하고 깃털보다 가벼운 무게감의 발언이 그 어떤 진심이 담긴 설득과 설교보다도 유키야마의 마음에 깊숙이 와닿았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런 쇼코라의 영향 탓에, 유키야마는 기억 찾는 걸 일찌감치 때려치고 몸 튼튼한 노비로 계속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노비 이름은 모르쇠로 지으면 딱이렷다.

녀석의 주된 일과는 쇼코라 주위에 딱 붙어있기.

가만히 있어도 쇼코라가 녀석의 주위를 위성처럼 빙글빙글 돌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보면 되지만, 아자부 이토리와 어느 정도 대등한 싸움을 벌일 수 있는 괴물이 떡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쇼코라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점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런 든든한 경호원이 붙어있음에도 쇼코라의 불안 증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고 날이 바뀔 때마다 그 두꺼운 웃음의 페르소나로도 가리지 못할 만큼 부풀어올라, 결국 제 3자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해보인다는 결론이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내려졌을 정도다.



여기서 제 3자란 다음에 이어서 소개할 인물인, 초고교급 상담부원 타키모리 유미코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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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교급 상담부원, 타키모리 유미코.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샛 오렌지색 머리칼에 망사 스타킹, 크롭티라는 꽤나 파격적인 아웃핏의 소녀다.

예쁘다기보단 귀여운 얼굴이지만 성격은 전혀 딴판.

남자들에겐 까칠하고 여자들에겐 상냥하지만,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생기면 바로바로 직언을 꽂아버리는 잔소리형 캐릭터다.

그런 점은 아마 경찰이었던 친부모를 닮은 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굳이 '친'부모라고 쓴 이유는 그녀의 어머니가 남편의 순직 이후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타키모리는 챕터 1에서 꽤 비중있게 다뤄졌던 인물이기도 한데, 카미나기를 취하게 해서 결과적으로 '나'의 위장 사망 트릭에 도움을 주었으며, 카미나기와 함께 현장 조사를 하다 잠깐 갈라서기도 했으나 학급재판에서 답답하게만 굴던 카미나기에게 일침을 가해 가볍게 각성시키는 역할까지 했다.

챕터 1의 히로인 격이라고 해도 아주 심한 과장은 아닐 거다.


타키모리 유미코는 모노쿠마 호텔에서 가장 상식에 가까운 행동원리를 보유한 인물이다.

옳은 건 옳은 거고, 옳지 못한 건 옳지 못한 것.

즉 도덕과 합리를 적당히 따져가며 일을 처리하는 몇 안되는 초고교급 학생들 중 하나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건물 복도를 걷다가 행인과 어깨를 부딪혔고, 당신은 들고 옮기던 짐을 몽땅 쏟아버렸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그게 레이몬 하루히라면 상대가 누구든 간, 과실이 누구에게 있든 간에 일단 고개를 숙이고 음침한 얼굴로 "죄송합니다"라며 사과를 할 테다.

물건을 주워담는 데에도 남의 도움은 바라지 않고, 이미 행인은 저 멀리 가버린 뒤다.


한편 시무라 카리나는 그게 설령 자기 과실이라 해도 어떻게든 따지고들어 상대에게 사과, 혹은 약간의 피해보상을 받아낼 타입이다.


번외로 아리스 윈터우즈는 '복도가 너무 좁게 지어진 탓이네요' 라면서 건물 설계자를 탓 할 괴짜 타입.


한편 타키모리의 경우엔 이렇게 된다.

일단은 가볍게 사과를 한 뒤에, 상대의 태도에 상관없이 시시비비를 가려 잘잘못을 따진다.

별 생각없이 지나가려던 상대는 어느덧 타키모리에게 붙들려 대화를 나누다가 타키모리가 하는 말마다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고, 결국 과실이 누구에게 있든 간 타키모리의 짐을 함께 날라주고나서 연락처 교환까지 하게 된다.

그러고선 잠자리에 들 때 쯤 아, 오늘 참 좋은 사람을 만났어, 라고 그 날 하루를 되새긴다.


타키모리에겐 사람을 매료시키는 압도적인 마력이 있다.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엄청나다거나 쇼코라 치에처럼 애교를 잘 부린다던가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말솜씨가 귀신같이 뛰어나다거나, 논리가 대학 교수보다 정연하다던가 하는 문제도 아니다.

'언어의 질량이 다르다'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이 타키모리의 재능적 특성을 설명하는 가장 훌륭한 문구다.

쇼코라의 재능이 맛있는 디저트를 만드는 것이라면 타키모리는 말로 상대의 호감을 사는 게 재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어지간히 마음의 문을 걸어잠근 사람이라고 해도 타키모리와 단 둘이 대화를 나누다보면 30분 안에 무장해제되어 모든 속마음을 털어놓게 된다.

마음만 먹으면 싸이코패스 사형수를 회개시킬 수도 있고, 여러번 자살 시도를 한 우울증 환자를 엔돌핀이 폭발하는 조증 환자로 만들어놓을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심리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초고교급 재능이 살인게임에서 얼마나 무섭게 작용할 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는 바지만, 다행스런 점은 앞서 말했듯 타키모리가 가진 합리성과 이타성이 평균을 아득히 넘어선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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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모리 유미코: "……역시 이대로는 안 돼. 내가 나설 수 밖엔 없겠어."


살인게임 5일차 밤, 즉 어촌으로 무대를 옮긴 그 날 저녁 타키모리가 대뜸 꺼낸 말이었다. 거의 모든 생존자들이 식사와 조사 보고를 위해 모여있던 자리였다.

이목이 모인 가운데 타키모리는 무언가에 잔뜩 화가 난 듯이 미간을 찌푸리는 기묘한 표정으로 (하지만 전혀 화 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을 이어나갔다.


타키모리 유미코: "아침부터 지금까지, 다들 살인게임의 흑막을 잡니 마니, 경찰을 기다리니 마니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

타키모리 유미코: "흑막은 존재 자체가 불확실해. 경찰은 언제 올 지, 안 올 지도 몰라. 우리가 가장 경계하고 대비해야 할 건… 다름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고."


약간의 웅성거림.


타키모리 유미코: "떠올려봐. '단간론파'의 규칙을. 이 호텔에서 나가는 가장 확식하게 명시된 방법은 타인의 목숨을 빼앗고 학급재판에서 승리하는 거야.

아마도 그 규칙은 피에로들이 가상현실을 장악한 지금도 여전하겠지. 피에로들이 바라는 건 흥미진진한 살인게임이랬으니까."

타키모리 유미코: "여기서 절대로 자신이 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절대로 타인에게 살해당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절대로 타인을 살해할 마음이 들지 않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어?

그리고 너희들…. 매일 같은 방을 쓰는 자신의 파트너는, 믿을 수 있어? 특히 여학생들은 말이야. 이런 극한 상황에서 마음 편히 남학생과 한 방을 쓸 수 있냐는 말이야."


공감하는 듯 끄덕거리는 이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수긍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카미나기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타키모리 유미코: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우린 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 자신과 주위를 둘러봐. 명확하게 상황을 인지하고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거야. 냉정하게, 하지만 절대로 초조하지 않게.

…얘들아. 초조함은 살인으로 이어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덮어놓고 침착을 유지하라는 것도 역시 무리한 요구겠지….

그래서 가능하다면 내가 도움이 되고 싶어. 정말 어렵겠지만, 살인게임이 기능하는 걸 완전히 멈춰버릴 방법이 내게 있어."

타키뮤리 유미코: "당장 오늘 저녁부터 시작이야. 상담이 필요한 사람은 3F의 내 연구교실로 찾아와. 심야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선 언제든 열어놓을게.

어떻게든 살인하고픈 마음 자체가 들지 않도록 해 줄테니까, 작은 근심 걱정이라도 있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문을 두드려줘. 권유하듯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건 반쯤 강요하는 거야. 너희들의 마음이 평온해져야 내가 살아남는 데에도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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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모리의 안전을 걱정한 흰토끼를 비롯한 몇몇 여학생들의 조언을 거쳐 결국 상담실은 예약제로 진행되었다.

타키모리가 작성한 계획표에 따라서 상담이 진행되고, 내담자 목록은 기본적으로는 비공개지만 만약을 위해 카미나기와 아리스 윈터우즈에게만 공개로 밝혀둔다. 설령 살인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알리바이를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다는 의미에서였다.

물론 타키모리의 상담 권유(혹은 강요)를 거절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타키모리가 말한대로 서로를 경계해야한다면, 당연히 1대1로 좁은 공간에서 대면하는 것 자체가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야 귀여운 여자애랑 공짜로 데이트 할 수 있는 기회인데, 걷어차는 건 말이 안되잖는가?

꼬시는 건 무리여도 손 정도는 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나'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상담실의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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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키모리 유미코의 끈적끈적한 상담 내용은 나중에 알아보고, 지금은 타키모리의 파트너이자 그녀의 상담실에 찾아가지 않은 사람 중 하나인 토미하레 소루에게로 넘어가보자.


토미하레 소루. 아름다운 은청색 장발에 큰음자리표 머리띠가 인상적인 희대의 미소'년'이다.

미소'년'에 강조를 두는 이유는, 아마 토미소루의 생김새를 자료로 본 사람이라면 이해하겠지만, 그가 웬만한 여학생 뺨치도록 예쁘장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살얼음처럼 차갑고 가녀린 눈매에 빗물만큼이나 투명한 피부.

그 미모 탓에 알아차리는 게 둔감한 몇몇 학생들은 타키모리 유미코와 토미하레 소루 중 어느 쪽이 남자인지에 대해 하찮은 토론까지 벌였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모노쿠마가 첫 오프닝 때 '태그는 남녀끼리 한 쌍'이라고 못박아두지 않았다면 아마 카미나기도 그를 여자라고 생각했을테고, 사전 정보에 성별이 적혀있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 녀석의 파트너가 되고싶어 했을 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그 정도 와꾸면 씹가능이라고 생각한다.



토미하레 소루의 재능은 초고교급 현악부원.

의외로 남쪽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현이 달린 악기라면 뭐든지 수준급 이상으로 다룰 수 있으며, 특히나 바이올린 류의 악기들(바이올린보다 작은 거나 큰 거, 비슷하게 생긴 그 부류들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초일류, 동양에서 환생한 파가니니라는 대찬사를 들을 만큼 뛰어난 두각을 보였다는 점은 몇 번이나 강조해도 부족할 만큼 분명한 사실이었다.

누구를 상대하든 일단 두껍고 높은 마음의 벽을 세워두는 그의 빙하 같은 성격이 발목을 잡아 명성에 비해 공연 활동은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수많은 관객 앞에서 공연을 펼치기보단, 마니아 중에서도 극소수의 권위자, 혹은 높은 사회적 지위와 교양을 갖춘 소규모의 관객을 작은 방에 모아두고 홀로 연주회를 펼치는 걸 좋아한다.

그의 연주는 아주 차갑고 날카로워서, 눈에 보이지 않는 청각 신경을 예리한 톱으로 사각사각 조각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천공 모노쿠마 호텔에 입주하기 전까지는, '나'는 그 평가가 그저 형편없는 비유라고만 생각했다.



바로 위에서 빙하같은 성격이라고 했다만, 그런 도도한 얼음공주 캐릭터에 걸맞지 않은 크나큰 옥에 티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지능이다.

보통 이렇게 생긴 캐릭터들은 대개 지능캐이기 마련이거늘, 신은 소루에게 지성까지 안겨주기엔 너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유키야마와 달리 소루는 스스로의 멍청함을 잘 숙지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도발에 쉽게 넘어가 아야키치 슌에게 카드게임으로 된통 혼난 적이 있지만, 대체로 소루는 주제파악을 잘 하고 있으며 두뇌가 동원되는 부분에 함부로 나서지 않는 편이었다.



한편, 학급 재판부터 이어진 그의 언동은 도무지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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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하레 소루: "아름다워…!"

타키모리 유미코: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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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누키 켄마와 하루히의 죽음을 마주하고 내뱉은 그의 외마디 탄성.

아름다워.

그 말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오직 타키모리 유미코 한 사람 뿐이었다.

아름답다니, 아름답다라니…?

자신의 두 귀로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티키모리는 곧장 소루의 양 어깨죽지를 붙잡고 경악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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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모리 유미코: "바… 방금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토미하레 군?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토미하레 소루: "아… 후후. 후후후후. 후후훗."

타키모리 유미코: "…너, 뭐, 뭐야…! 대체 뭐냐니까!"

토미하레 소루: "아아, 당신은 보이지 않는 건가요? 아니면, 들리지 않는 건가요? 온종일 소음만을 듣다보니 귀머거리가 된 건가요?"

타키모리 유미코: "……."

토미하레 소루: "아아, 그럴 만도 하겠죠. 당신처럼 교양없는 가축에 가까운 인간이라면야…."

토미하레 소루: "……그야, '예술'은 곧 '특권'이니까. 훗. 후후후훗. 후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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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하레 소루는 어촌으로 무대를 옮길 때 모노사메에게 질질 끌려온 이후로 단 한 번도 학생들 앞에 제대로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의 생존과 위치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건 매일 밤마다 3F에서 들려오는 그의 광기 서린 바이올린 소리 탓이었다.

그 굳게 잠긴 연구교실에서 들려오는 곡의 제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분명 그 연주를 잠깐이라도 귀기울여 들은 사람이라면 직감적으로 알았을 거다. 그 곡에 제목 따위가 붙을 리 없다는 것쯤은 말이다.

마치 부서지는 파도처럼, 혹은 굽이치는 회오리처럼 불규칙하면서도 압도하는 그 선율은 분명 인류가 전에 들어보지 못한 어떤 기고한 종류의 것임이 확실했다.

누가 그 멜로디를 악보에 옮겨 담을 수 있을까? 어느 누가 그 연주를 재현해낼 수 있을까?

세이렌의 노랫소리만큼 아름답고 새벽녘의 뱃고동보다 힘찬, 침몰하는 타이타닉보다 비장하고 떠오르는 보름달보다 슬픈 그 연주.

그 마녀의 저주와도 같은 연주는 매일 오후 10시부터 시작되어, 다음날 기상 방송이 울릴 때까지 한시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잠긴 연구교실 속 연주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눈빛도 적지 않았지만, 누구 하나 그 연주를 깰 용기는 없었다.





귀신의 연주소리가 홀연히 끊겨 사라진 건, 살인게임 8일째의 이른 밤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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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 카미나기 한나
A] <시청자 대표> 카라스야마 류이치

B] <초고교급 보디가드> 아자부 이토리
B] <초고교급 갬블러> 아야키치 슌

C] <초고교급 JK???> 쇼코라 치에
C] <초고교급 ???> 유키야마 카무이

D] <초고교급 상담부원> 타키모리 유미코
D] <초고교급 현악부원> 토미하레 소루

E] <시청자 대표> 레이몬 하루히 ​DEAD​
E] <초고교급 펜싱선수> 키리누키 켄마 ​DEAD​

F] <초고교급 실험부원> 타노 나타타
F] <초고교급 대장장이> 타치바나 츠나요시

G] <초고교급 랭킹메이커> 이나모리 쿠키
G] <초고교급 사서> 이시미네 칸

H] <초고교급 동화작가> 아리스 윈터우즈
H] <시청자 대표> 후네즈 신지

I] <시청자 대표> 시무라 카리나 ​DEAD​
I] <초고교급 변호사>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J] <초고교급 르포기자> 시가라토 유즈
J] <초고교급 연극배우> 키쇼


모노쿠마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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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연재하자...!


전개방식이 휙 뒤바꼈는데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좀 걱정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