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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발언자의 신원을 표기하기 위해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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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 ch.2 일상편
<주황은 고통, 파랑은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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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무언가 알고있는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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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이었다.

막 너털너털 사다리에서 내려온 이시미네의 머리 위로 방금 전까지 그가 정리하던 장서더미들이 휘청이는 책장과 함께 손쓸 틈도 없이 쏟아져내렸다.

피할 틈도 능력도 없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힘도 없었다.

그대로 종이의 산사태에 휩쓸린 이시미네는 쏟아져내리는 수백 권의 책더미와 책장의 무게에 그대로 생매장당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무게의 압박 속에서 천천히 질식해갔다.



명백한 살의.

손쉬운 먹잇감.

깔끔한 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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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밤중에 배가 고파 라운지 층에 내려와있던 이 몸의 순발력이 아니었다면, 그 사건은 분명 미수로 그치지만은 않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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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진상 파악 이전에 초고교급 동화작가, 아리스 윈터우즈를 소개한다.

168cm. 50kg. 다리가 길쭉해서인지 구두를 신어서인지 겉보기엔 조금 더 커 보인다. 문양의 위치는 왼쪽 눈썹.

혈액형은 특이하게도 RH -의 AB형. 의외로 바스트 볼륨이 꽤 있고 바디라인이 훌륭한 편.

생일은 8월 3일이며, 좌우명 같은 건 따로 없음.

좋아하는 것은 벽난로. 정확히는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걸터앉아 따뜻한 핫초코를 홀짝이며 책을 쓰는 것.

반대로 싫어하는 것은 '마감 독촉'으로, 제 아무리 스타 작가라고 해도 피해갈 수 없는 편집부의 마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지적 캐빨 시점으로 바라본 아리스 윈터우즈의 특징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외모'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잿빛 머리칼에 백설 같은 피부, 마음이 투명하게 비치는 푸른 달빛의 눈동자.

여러 동화 속 공주들을 적당히 뒤섞어 뽑아낸 듯한 그 이국적이고 신비로우면서도 화사하기 그지없는 미모엔 남녀를 불문하고 탄성을 뱉을 수밖엔 없다.

따라서 그녀가 맡게 된 역할도 20인의 살인게임 플레이어들 중 외모로만 보았을 때엔 단연 눈에 띄는, 일명 '비쥬얼픽'.

아이돌 그룹에 댄스 담당, 랩 담당, 보컬 담당, 예능 담당, 그리고 비쥬얼 담당이 있듯 단간론파에는 추리 담당, 조사 담당, 감동 담당, 예능 담당, 그리고 비쥬얼 담당이 있다.

반대로 말하면 추리도 못하고, 조사도 별 거 없고, 감동적인 사연도 딱히 없고, 그렇다고 개그캐도 아닌 무능무능한 잉여 찐따 캐릭터이지만 그나마 얼굴이 일을 열심히 하는 케이스다.

뭐, 이런 캐릭터 하나쯤은 있어도 나쁘지 않긴 하다.

보통 일찍 잉여처럼 죽고 사라지거나 후반부에 발암 혹은 병풍 캐릭터 역할을 소화하기 마련이지만 굿즈 팔아먹는 데엔 도움이 된다.


별 생존력 없는 잉여 캐릭터답게 그녀의 평소 행실이나 성격도 참 알기 쉬운 편이다.

그녀에겐 뭇 인간들이 가지고있는 감정을 숨길 수 있는 필터 자체가 결여되어있어서, 무언가 불편하거나 숨기는 게 있으면 곧바로 안색이 시들어버린다.

반대로 모노쿠마 크레딧을 아껴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던지 하는 등의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금세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음꽃을 피우고, 그러다가도 금세 침울한 현실을 파악하고 혼자 곡소리를 내며 고민에 빠지는 참 어린애같은 캐릭터다.

금방 삐졌다가 금방 회복해서 웃고, 아무리 상황이 심각해도 일단 눈앞의 즐거움에는 도리없이 웃어버리는 그 단순함.

특히나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면 뭐든지 발을 담궈보려는 그 무구한 호기심은 아리스 윈터우즈를 이야기 할 때 꼭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어째선지 서류에 적혀있지 않았지만 아마도 건강 상의 이유로)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유년기를 보낸 아리스는 어릴 적부터 '바깥 세상'을 상상하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고, 그 최초의 그림동화가 우연한 계기로 출판되면서 얼굴 없는 동화작가의 전설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아리스의 갈망, 환상, 그리고 그녀의 천부적인 창의성을 배경으로 창작된 동화들은 세상에 공개되는 속속 판매 기록을 갈아치웠으나 언제까지나 그 작가의 얼굴과 자세한 신분은 공개되지 않았다.

출판사 직원들의 입을 타고 흘러나온 '신비한 은발의 소녀'에 대한 썰만 가득할 뿐. 아리스의 가족은 여전히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했고, 결국 그 투명한 장벽에 가로막혀 세상도 아리스도 서로에 대해 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청소년기에 들어서고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을 되찾은 아리스는 돌연 집필활동이라는 세상과의 유일한 교류를 끊어냈고, 잠깐의 이슈를 만들어낸 뒤 수많은 유명인들이 흔히들 그러듯이 서서히 대중으로부터 잊혀져갔다.

붉은 발의 아리스 님이라는 괴담은 아리스가 홀연히 종적을 감춘 이후 수 년 뒤에 불현듯 입소문을 타고 솟아난 괴담으로, 그 유명 동화작가인 아리스 윈터우즈가 소문대로 잿빛 은발의 미소녀 여고생이며, 절필이 아니라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한 지 수 년이 지났지만 그녀를 닮은 원령이 이따금씩 세계 각지의 도서관에서 목격된다… 라는 상당히 클래식한 스타일의 괴담이다.



하지만 별 거 아닌 것 같은 이 괴담이, 사실은 아리스 윈터우즈라는 인물의 정체에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크나큰 미스테리다.

괴담에 따르면 아리스가 절필한 시기에 그녀의 나이는 이미 고등학생, 최소 중학생이었다.

괴담이 퍼지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최소 3년 뒤, 그리고 괴담이 퍼진 지로부터 시청자 대표들이 아리스 윈터우즈의 천공호텔 단간론파 참가 소식을 확인한 게 그로부터 다시 5년 뒤다.



나이가 맞지 않는다. 나이가.

괴담이 부분적으로나마 사실이라면 아리스 윈터우즈는 이미 20대 중후반 정도의 나이여야 하고, 괴담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아리스가 갓난아기 때부터 집필활동을 한 게 아니라면 최소한 '초고교급'이라고 부르기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 수수께끼를 '나'는 흰토끼에게 공유했지만 흰토끼는 애초에 아리스 윈터우즈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고, 같은 시청자 대표인 신지는 대화에 응해주질 않았다.

그래서 해답을 얻기 위해 찾아간 것이 그 녀석이었다.

책벌레이자 아리스 브랜드의 오타쿠인 안경 거치대 놈 말이다.

최근 녀석의 행태를 생각하면 그 늦은 시간일지라도 분명 책정리나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 '나'는 평생 발 들일 일이 없을 거라 믿었던 도서관을 찾았고, 이윽고 넘어진 책장과 쏟아진 책더미들을 발견하고 사태를 직감했다.



꼼짝없이 시체를 발견하게 될 거라 예상했던 것관 달리, 낑낑대며 쌓인 책들을 치워내고 사람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 안경거치대는 기절했을 뿐 질식이나 압사당하진 않은 것 같았다. 운 좋은 녀석.

기절한 놈을 어떻게 해 줄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죽은 게 아니라면 귀찮게 옮길 이유는 없지, 싶어서 얼굴만 쏙 내놓은 채 방치해뒀다. 마치 모래사장에 몸을 묻은 어린아이 장난 같았다.

궁금한 점은 나중에 정신을 차린 뒤에 천천히 물으면 되겠지.

그보다는 이런 소행을 벌인 녀석을 추적하는 게 우선이었다. 사고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은 사건에 초점을 두었다.

안경거치대가 죽지 않은 걸 보면 분명 책장이 쓰러진 지도 오래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방금 도서관에 들어온 '나'는 아직 누굴 마주친 적이 없다.

그렇다는 건, 범인은 아직 도서관에 있을 확률이….



그때였다. 어떤 실루엣이 다급한 발소리를 내며 도서관을 뛰쳐나간 건.


낌새를 알아챈 '나'는 급하게 범인의 기척을 뒤쫓았지만 이미 녀석은 라운지에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재빠르군. 그리고 발소리가 가벼워. 무엇보다도 머리가 길고 선이 가늘었다.


거치대를 살해하려 한 범인은….


아무래도 여성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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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와 이시미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 다음은 아리스 괴담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파트너로 택한 그에 대해 알아보자.

챕터 2 시점에서 생존한 두 시청자 대표 중 나머지 한 사람.

시청자 대표이자 타투이스트를 겸하고 있는 후네즈 신지 말이다.



아시다시피 신지 녀석은 초고교급과는 거리가 먼 지라, 당연히 방송국으로부터 받아낸 사전 정보 따윈 없다.

그러니 녀석의 자세한 키, 몸무게, 신체 사이즈 따위도 오히려 알 수 없고 (보통 변태가 아닌 이상 친구의 신체정보를 일일히 꿰고 있진 않으니까) 사생활 침해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이거, 라는 생각이 들 법한 가정사 등의 이야기도 말해줄 수 없다.

이말인즉슨 당신이 신지에 대해 듣지 못할 사실들은 아마 나 또한 모르는 이야기이고, 그러니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일랑 하덜 마라는 뜻이다.

아는 건 전부 이야기해줄 테니까. 약속했던 대로.



스무 명 중에서도 가장 큰 키에 호리호리한 느낌이지만 꽤 건장한 체격, 반쯤 땋다 만 괴상한 드레드 헤어스타일, 몸 여기저기를 덮은 공격적인 타투 탓에 쉽게 호감을 가지기 어려운 외모를 가진 신지는 '조직'에서도 괴짜 중의 괴짜였다.

이미 미성년자가 아니라는 소문도 돌았고, 어느 음지의 마약조직에서 나고 자랐다가 탈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문, 몸에 새겨진 칼자국을 가리기 위해서 타투를 했다는 소문, 마음에 드는 모델이 있으면 소년이든 소녀든 가리지 않고 납치해서 타투를 새겨버린다는 소문 등 온갖 떠돌아다니는 괴소문의 중심이었다.

아무리 거짓말쟁이가 많은 우리 조직이라도 정도가 있지, 신지를 겹겹이 둘러싼 소문들은 출처도 근거도 뭣도 없는 주제에 다양하고 허무맹랑하기만 해서 영양가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유쾌범죄에 동참해주기만 한다면, 그리고 몇 가지 규칙만 지킨다면 퇴물 코미디언이든 오컬트 오타쿠 소녀든 침팬지 오랑우탄이든 뭐든 입단 환영인 우리 조직에서 겨우 음침한 타투이스트의 존재 따위가 문제시되지는 않았다.



'작전'이 있는 날이면 신지는 무리에서 살짝 겉돌면서도 꼭 한번은 성대하고 결정적인 사고를 치곤 했다.

우리가 동물원 정문에 스프레이 뿌리며 놀고 있을 때 놈은 발정제 먹인 코뿔소 부랄에 타투를 새겨서 날뛰게 만든다던지, 은행 금고 속의 돈을 몰래 산더미 같은 초코바로 바꿔놓는 계획일 땐 뜬금없이 복면 쓴 무장강도인척 쇼를 해서 시민들에게 겁을 주고 경찰의 어그로를 끈다던지, 박물관의 티라노 모형을 모션 센서로 조작해서 관광객들을 겁주려 했을 땐 티라노 두개골에 화염방사기를 달아놔서 박물관을 박살낸다던지.

녀석은 정말로 손을 댄 모든 것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여버리는 재주가 있다.


그런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똘기에 이끌린 사람들은 그의 친구가 되기도 했고, 도무지 감당 못 할 막무가내에 질린 이들은 그를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전자에 속했기에 몇 번의 모임 후 신지와 급속도로 친밀한 관계를 쌓아올렸고, 이후 시무라 카리나와 레이몬 하루히까지 묶여서 조직 내에서도 친밀한 4인방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신지와 '나'의 관계는 시청자 대표들 간의 어떠한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 셈이었다.



신지의 고약한 점이라면야 고작 한 두가지로 설명될 게 아니지만, 그 성격을 한 줄 요약하자면 '자신만 알려고 하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넘치는 호기심을 주체할 인내심도, 생각도 없는 후네즈 신지는 한 번 관심이 꽂힌 대상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며 자신의 탐구욕을 만족시키려한다.

밥은 먹었니,

먹었다면 그 메뉴는 뭐니,

잠은 잘 잤니,

오늘 하루 계획은 어떻게 되니,

오늘 속옷 색은 뭐니 하는 일상적인 질문에서부터,

부모님과 형제가 어쩌니 하는 호구조사,

장래희망이 뭐니 취미가 뭐니 하는 선호도 조사에,

남자 취향은 어떠니 여자 취향은 어떠니,

좋아하는 장르나 플레이는 있니 같은 별 쓰잘데기 없는 소리도 질리지 않고 뱉어낸다.

분량 상 생략은 되었겠지만 아마 카미나기도 1챕터 4일차에 분명히 당했을 거다. 류를 죽인거야? 어떻게 죽였어? 우와, 대단해. 이런 식으로.



그렇게 상대가 따귀를 때리거나 도망갈 때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소름돋기 그지 없지만 더욱 심각한 건 자신에 대한 얘기는 일절 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신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한 거의 진실을 말하려 들지 않는다.

언제는 뱀을 좋아한다더니 다른 날에는 파충류가 무섭다며 진저리를 떨고, 부모님이 안계신 것처럼 굴더니 어느 날엔 아버지와 통화하는 행세를 했다.

언제는 재즈 LP 모으는 게 취미라더니 며칠 후엔 재즈보단 힙합이 낫지 않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녀석과 친해지고 여러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게 된 뒤에야, '나'는 녀석을 둘러싸고 있던 숱한 헛소문들의 출처를 알게 된 셈이었다.

우리 조직의 구성원들은 '나'를 비롯해서 대개가 거짓말쟁이들이지만, 신지의 경우엔 그 범위가 한정된 만큼 더욱 정도가 심하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신지가 내게 했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하나 있다.

아마 그것만큼은 스스로에 대한서도 진실이었으리라고 지금껏 어림짐작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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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네즈 신지: "저기 있지. 나는 아직 쓸만한 폐가구들을 주워다 모아두는 걸 좋아해. 누가 집을 찾아왔을 때 그럴듯한 골동품인 것처럼 설명하면 재미난 취미를 가졌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여주거든♧.

후훗. 웃기지? 내 '재미난 취미'에 자신이 한껏 어울려주는 중인줄도 모르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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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혼자만 독차지하려고 하는 그 고약한 심보는 천공 모노쿠마 호텔에서도 여전해서, 후네즈 신지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하루히와 카리나의 죽음 이후로 한층 더 미스테리해졌다.


두 녀석들의 죽음 이후 '나'는 분명 신지가 내게 의지해오거나, 혹은 내가 신지에게 기댈 구석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지는 의지는커녕 평소보다도 더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며 대화를 거부했다.

미안, 나중에.

지금은 좀 바빠.

생각하는 중이야.

다음 기회에.

생각이 정리되면 말해줄게.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아무리 신지라고 해도 이건 낌새가 좀 이상했다.

거짓말을 늘어놓을지언정 절대 먼저 말 걸어오는 상대를 피하지는 않는 녀석인데.

어떻게든 붙잡고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어느 새벽 카미나기가 잠든 틈을 타 개인실을 빠져나와 비밀스럽게 신지를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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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네즈 신지: "으음~ 하긴 뭐…. 류 쨩이라면 상관 없으려나¿"

"……."


안개 낀 어촌 거리의 한 버려진 가옥.

유리가 모두 떨어져나간 창가에 기대, 신지 녀석은 새빨간 사과를 그 커다란 손에 쥐고는 아작아작 씹어먹었다.

마치 옛날 만화에 나오는 어떤 사신 캐릭터를 닮았다.


작은 편은 아니어도 자신보단 훨씬 키가 작은 '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며, 신지는 그 검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반으로 살짝 갈라진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게 정말 꼴보기가 싫었다.



후네즈 신지: "…흐음. 아니야. 그래도 때가 너무 일러. 조금 더 드라마틱한 전개를 원해."

"드라마틱…?"

"……."

"신지. 좀 쳐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어?"

후네즈 신지: "와아~ 그거 기대되네. 류 쨩, 몸 쓰는 일은 조직 제일이었으니까. 흐음. 체급차이가 나긴 해도 역시 싸우면 내가 지려나~♤."



이미 알고들 있겠지만 '나'는 인내심이 꽤나 부족한 편이다.

경고도 없이 날아든 주먹을 코에 정통으로 맞고 나가떨어진 신지는 손등으로 코피를 슥슥 닦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덤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후네즈 신지: "으아, 정말로 얻어맞아버렸네…. 류 쨩을 화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직도 이게 게임 같냐? 즐겁게 뛰놀던 놀이 같아? 이건 더 이상 유쾌범죄도 단간론파도 뭣도 아니야. 하루히가 죽고 시무라가 뒤졌어. 별 관심은 없지만 초고교급 펜싱선수인 키리누키 켄마도 살해당했어, 하루히를 지키다가. 실제로 사람이 죽어나고 있는 와중에…."

후네즈 신지: "풉."

"……."

후네즈 신지: "여어. 류 쨩, 얼마 전에, 단간론파 개막 사흘차에 말야. 흰토끼 쨩을 죽이려고 했었지? 말하지 않아도 알거든, 앞 뒤 돌아가는 상황이나 눈치를 보면. 결과적으론 그만둔 것 같지만, 류 쨩이 그때 정말로 일을 저질러버렸다면 과연 흰토끼 짱은 어떻게 됐을까? 그런 무책임한 사람한테 사람이 실제로 죽니 마니 하는 설교를 들어봤자 별 감흥 없는 걸."

"그야 그때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

후네즈 신지: "'인간은 무지의 죄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류 쨩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잖아, 안 그래?"

"……."

후네즈 신지: "살인게임이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다고? 세상에, 류 쨩. 세상에! 인간이 한 평생 내리는 결정 중에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는 경우가 얼마나 될 것 같아?

50%? 30%? 10%? 그것도 아니면 1%?

우리들은 단간론파의 초대장을 받아들 때 사태가 이렇게 될 줄 몰랐지. 그렇다고 해서 시청자 대표들의 어리석음이 사면받을 수 있을까? 글쎄. 아마 전 세계 시청자 절반쯤은 초고교급들을 걱정하는 동시에 우릴 비웃고 있을 걸."

"궤변이야. 뱀좆 같은 아가리 놀리지 마."

후네즈 신지: "하하, 왜. 자기 사상을 남의 입을 통해 들으니 논리의 허점이 여기저기서 느껴지나보지?"


'나'는 넘어진 후네즈를 발로 다시 걷어찼다. 녀석은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내게 맞는 걸 오히려 즐기는 듯 오징어 먹물 같이 끈적한 웃음을 흘렸다.


"신지, 이 개새끼야. 아무리 우리 조직이 개막장 무정부주의 인간미만 꼴통들의 모임이라고 해도 말이다, 넘어선 안 되는 규율이 딱 하나 있거든?"

후네즈 신지: "살인만은 엄격하게 금지. 알지, 나도 알아. 사람이 죽는 게 즐거울 리가 없다나 뭐라나. 하핫. 류 쨩, 누가 들으면 시무라를 죽인 게 나인 줄 알겠어?"

"뭐…."

후네즈 신지: "정신 차려, 류 쨩. 아무리 하루히 쨩을 두둔하고 싶어도 그렇지, 친구의 죄를 또다른 친구에게 덮어씌우려는 건 너무 버러지같다고 생각하지 않니? 후훗. 이렇게 두들겨 패기나 하고 말야. 중학생도 아니고…."


카리나가 죽은 건 하루히의 탓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또 무지의 죄를 들먹일 게 뻔했기 때문에.

결국 '나'는 제풀에 지쳐 습기 찬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힘없이 묻는 수밖엔 없었다.



"…최소한 언제까지 이딴식으로 굴 건지만이라도 말해. 언제쯤 되야 네가 말하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펼쳐지는 건지. 언제쯤 되어야 그 시기라는 게 무르익는 건지."

후네즈 신지: "한 챕터 뒤에."

"…뭐라고?"

후네즈 신지: "사람이 더 죽고, 학급재판을 한 번 더 거친 뒤에. 누군가가 피에로들에게 살해당하고 난 뒤. 그러고나면, 그러고나면 네겐 내가 숨기고 있는 모든 걸 말해줄게. 그 전까진 안돼. 아무리 나를 두들겨패고 설득해도 소용없어."

"……."

후네즈 신지: "후훗. 나왔다. 그 확 불타올랐다가 금세 질리고 식어버리는, 독수리와 썩은 생선을 한순간에 오가는 눈동자. 너무 그러지 마, 아무리 그래도 약속 정도는 지킬테니까. 그치만 내가 다음 학급재판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지는 또 모르는 문제지.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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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입으로 생존 플래그와 사망 플래그를 번갈아가며 꽂았다 뽑았다 해대는 녀석의 말상대를 더는 할 수 없다 여긴 '나'는 도망치는 듯한 뜀걸음으로 모노쿠마 호텔로 돌아갔다.

두 번째 학급재판 이후를 암시하는 그 녀석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에 대해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지는 꿈에도 생각치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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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태그 H는 이렇게 넘기고 오늘의 마지막 초고교급인 초고교급 변호사, 무라츠바키 마사오미를 이야기하자.

(시무라는 태그 E와 마찬가지로 스킵.)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178cm (생각보다 작다.). 75kg. 근육량은 꽤 있는 편. 혈액형은 O.

생일은 7월 29일. 꽃말은 불타는 마음.

글쎄. 불타는 머리카락인 건 척 봐도 알겠는데 불타는 마음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좋아하는 건 의외로 '매운 음식'으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오게 생긴 냉혈한 주제에 음식은 항상 매운 카레, 매운 양고기, 매운 국물요리 등 저렇게 먹다보면 위암이 생기진 않을까 괜히 마음에도 없는 걱정이 들 만큼 매운 맛 중독이다.

반대로 싫어하는 건 녹차.

정말로 겉보기와는 정 반대로 가는 독특한 식성향이다.




무라츠바키 마사오미라는 인물의 프로필을 처음 뒤져봤을 땐 솔직히 방송국 놈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초고교급 변호사라니?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재판 장르에 그런 인물을 섭외한단 말인가?

픽션에 불과한 원작 시리즈에서도 섣불리 법조계 재능은 터치하지 않는 게 법이었다. 그나마 추리계에 가까운 재능이라곤 탐정이 고작이었는데. 변호사는 너무 규격 외의 재능이 아닌가?



…라는 걱정을 잔뜩 한 것 치곤, 1챕터에서 무라츠바키의 활약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잠깐 용의선상에 올랐던 넘어가려고 했을 때 이외엔 재판 내내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그 이전에도 어디서 뭘 하는지 두문불출하며 카미나기의 시야에 전혀 띄지 않았다.

단 한번, 첫 인사를 나눴을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워낙 초반부라 다들 기억은 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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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츠바키 마사유미: "좋습니다. 적어도 제게 방해는 되지 않겠다는 거니. 안심하고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군요."

카미나기 한나: "무슨 확고한 계획이라도 있으신 것처럼… 들리네요? 후후."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살인을 할 겁니다. 딱 한 사람만 죽이면 됩니다."

카미나기 한나: "어머. 그러시군요."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그리고 카미나기 씨는 아닙니다."

카미나기 한나: "고맙네요, 그건. 중립이긴 하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까?"

카미나기 한나: "아뇨. 제대로 이해했어요. 서로 더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겠네요."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그럼 됐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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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에 다짜고짜 문답무용 살인 선언.


천공호텔 단간론파가 단순한 가상현실 놀이였을 때에야 뭐 특별한 플레이 목표가 있나보다 하고 넘어가기 쉬웠겠지만, 피에로들이 난입한 지금에 와서는 말이 다르다.

무라츠바키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걸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다른 초고교급들과는 달리 사전부터 무언가 알고있었던 게 아닐까?

설마 지금도 같은 생각인걸까?

그리고… 남은 생존자들 중 누굴 죽이려는 걸까?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곧장 수상한 냄새를 맡고 놈을 찾아 따져물으려고 했지만 카미나기는 곧장 단호하게 '나'를 막아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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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나기 한나: "안 돼요."

"비켜. 또 짜증나게 굴지 말고."

카미나기 한나: "가지 마세요. 무라마사 씨한테 직접 따지고 묻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라마사 씨의 이야길 떠들고 다니는 것도 좋지 않고요."

"방금 직접 이야길 누설한 주제에… 뭔 소리야 그건?"

카미나기 한나: "그건 협조하기로 했으니까 제가 아는 걸 털어놓은 거고요. 들어보세요. 무라마사 씨에게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더 캐물을 여지도 없어요. 하지만 캐묻는다해서 무라마사 씨가 곧이곧대로 진실을 털어놓겠냐면 그것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행적을 더 감추려하거나 방해하려 들면 죽이겠다, 뭐 이런 식으로 나올 수도 있겠죠."

"아니, 그건 좀 너무 간 것 같은데…. 뭐 그렇다 치고, 다른 놈들에게 알리면 안된다는 건 어째선데? 알아야 할 것 아니야? 무라츠바키 마사오미가 누군가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게 바로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게 네가 주장하던 '살인게임 일시정지'에 어울리는 판단 아니야?"

카미나기 한나: "아뇨, 생각해보세요. 만약 무라마사 씨가 비밀을 감추고 있고, 누군가를 표적삼아 살인을 계획하고 있을 확률이 아주 높다는 걸 모두가 알아봐요. 그러면 무라마사 씨는 어떻게 되겠어요?"

"어떻게 되긴. 뭐 흠씬 두들겨맞고 감금당하거나 만인의 경계 대상이 되거나 하겠지. 설마 겨우 그딴 걸 걱정하는 건 아니지?"

카미나기 한나: "겨우 그딴 거라뇨. 말을 너무 가볍게 하시는데, 지금처럼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폭력적으로 변해요. 이 얘길 들으면 분명 사람들은 무라마사 씨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에요. 무라마사 씨를 무작정 흑막으로 간주하고 박해하려는 사람도 생길 테고, 어쩌면 무라마사 씨가 자신을 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먼저 선수를 치려고 들 수도 있다고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요.

그리고 잊고 계신 것 같은데, 무라마사 씨는 자신이 살인할 생각이 있다는 걸 너무나도 당당하게,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제게 밝혔어요. 물론 나중에서야 발언의 의미가 확대된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만약 무라마사 씨가 흑막이나 흑막의 끄나풀이라면 그런 과감한 소릴 할 수 있겠어요?"

"결국 그 뾰족머리 변호사 놈의 신상이 걱정된다 이거잖아? 나 참. 혼자서 너무 멀리 간 거 아니야? 우린 아직 그 놈이 살인할 생각이 남아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고. 흑막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도 말야. 역시 직접 가서 따져묻는 게 좋겠네. 그렇지?"

카미나기 한나: "안된다니까요. 정 가시려거든… 차라리 미행을 하세요."

카미나기 한나: "직접 건드리는 것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것도 위험하다면 차라리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게 정론이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무라마사 씨가 너무 오래 개인행동을 하는 게 거슬리기도 했으니까. 다만 직접 접촉하진 마세요. 다만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무라마사 씨 쪽에서도 알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어디까지나 예방 차원으로."

"아주 당연하다는 듯 부려먹으려 드네. 흰토끼."

카미나기 한나: "할 거에요, 말 거에요?"

"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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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님이 까라면 까야지 뭐 어쩌겠냐.

이 대화를 나눴을 때가 어촌 2일차 밤이었나 그랬으니, 그 시점부터 무라츠바키의 행적에 대해서는 꽤 속속들이 아는 편이다.

카미나기의 말대로 적당히 거리를 두며 눈에 띄게 미행을 해서인지 녀석은 그다지 눈에 띄는 짓은 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개인적인 할 일들이 있다보니 항상 눈을 떼지 못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본 선에서는 가끔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누군가를 찾는 듯 호텔 복도를 기웃거리다 마는 것 정도 외엔 특별히 누군가를 노리거나 누군가와 접선할 낌새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미행 만 2일차, 즉 4일차 밤.

늘 실내에만 머물던 무라츠바키가 외출했고 우비조차 챙기지 못한 '나'도 그 뒤를 밟았다.

어촌의 굽이진 골목길을 지나던 무라츠바키가, 한 우물을 기점으로 갑자기 무섭도록 속도를 올렸다.


별 긴장감 없이 '이 새끼 축축해 죽겠는데 왜 외출이야…' 하고 툴툴대던 중 일어난 상황이었다.

거리를 유지하거나 기척을 감출 생각도 못하고 녀석이 둘러간 골목으로 뛰쳐들어간 '나'는 곧장 그 부주의함을 후회했다.

변호사라는 양반이 그렇게 곧장 사람 목에 칼을 들이밀 줄이야.

반격이나 회피할 틈도 없이 꼼짝없이 제압당해 벽으로 몰린 '나'는 순간 무라츠바키의 데스노트에 오른 인물이 내가 아니기를, 하는 얼빠진 생각을 하고 말았다.



"킥…. 이거 당했네. 살려주라. 다 카미나기가 시켜서 한 짓이야. 죽이려거든 그 녀석을 죽여. 내가 도와줄게."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그렇게 저속함을 뽐내지 않아도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 같은 잡범에겐 그럴 가치도 없습니다. 별 재능도 없는 주제에."

"초고교급 변호사 입에서 나와도 될 소린가 그거? 하,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죄다 속이 시커먼 놈 밖엔 없다니까, 이 호텔은."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죽이지 않겠다는 말, 자꾸 그렇게 떠들어대면 지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얼음같은 음성으로 나이프를 더 가까이 들이미니 절로 입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람. 자신만만하게 나섰는데.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카미나기 씨는 분명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미행을 붙이다니 실망입니다."

"…정말 간섭하려고 했으면 좀 더 과격한 방법을 썼겠지."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아뇨, 이미 충분히 간섭받고 있습니다. 당신이 귀찮게 따라붙지만 않았어도 이미 몇 번은 실행할 기회가 있었단 말입니다. 아니, 그 녀석도 그걸 알고있으니 더 과감하게 행동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



짧은 대화였지만 이미 유추할 건 전부 유추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진심이다. 아직까지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죽이려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살의를 감출 생각도 없이 오히려 환히 빛나도록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뭐하는 새끼지, 대체?



"대체 뭐하는 새끼냐, 너? 피에로 놈들과 한패라도 되는 거야? 시무라와 한 태그였잖냐, 네 놈. 파트너가 죽었는데 너무 태연하잖아?"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쯧. 그새를 못 참고 또. 시무라 카리나에겐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습니다. 그녀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도 회의도 느끼지 않고.

됐으니 호텔로 돌아가서 카미나기 씨에게 전하십시오. 더 이상 간섭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말라고. 당신들은 제게서 얻어갈 것도 잃을 것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저를 내버려 두는 편이 당신들의 신상에는 더 이로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설명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이만 작별을…. ……?"

"…?!"




무라츠바키가 겨우 나이프를 거두고 물러선 그때였다.



-펑….



강렬한 파열음이었다.


안개를 타고 흐르는 대기와 수증기의 진공에 본래도 분명 커다랬을 그 파열음이 몇 배로 증폭되어 귀를 울렸다.

방향은…. 워낙 울려대서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항구 쪽이다.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이게 무슨…? 윽?!"

"한눈 팔면 안되지!"


당황한 무라츠바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녀석의 손에 들린 나이프를 쳐냈다.

갑작스럽게 파열음이라니,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진 모르겠지만, 목에 나이프를 겨눠지고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만큼 순한 양 같은 성격은 아니니까.

바닥에 가득한 습기 탓에 미끄러저 넘어진 녀석은 처음으로 그 독수리 동상 같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가격당한 손목을 움켜쥐었다.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이런 바보같은 짓을…."

"킥, 뭐 어쩌라고. 고소라도 하시던가, 변호사님. 척 보니까 샌님치곤 운동 좀 한 것 같은데 어디 주먹질도 자신 있는지 한 번 볼까?"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멍청한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방금 그 소리를 듣고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겁니까? 풍선 터지는 소리 따위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폭발음이었습니다, 폭발음!"

"폭발음이 뭐 어쨌다고. 누가 불꽃놀이라도 하는가…."



'나'는 분명히 말을 끝마쳤지만 그 뒷부분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말하기가 무섭게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들.

펑, 퍼펑, 펑…. 고막이 얼얼하도록 귀를 때리는 파열음의 향연, 향연, 향연.

붉은 빛, 푸른 빛, 초록 빛, 짙은 안개를 지나며 왜곡되는 빛의 프리즘.


나이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나'와 무라츠바키는 무언가에 홀린 듯 돔 천장을 한껏 수놓은 불꽃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느덧 서로의 존재 따윈 중요치 않게 되어버렸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홀케이크를 자르는 것처럼 이질적이다 못해 역겹기까지 한 그 화려한 폭죽세례를 보았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무언가 걷잡을 수 없이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그 시퍼런 어둠을 찢어발긴 붉은 빛줄기들의 적나라한 암시를 우린 온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째선지, 이시미네를 중태에 빠뜨리고 도서관을 빠져나가던 그 여성스런 실루엣이 어렴풋이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부두로 갑시다. 최대한 빨리."

"...앞장서, 뒤따라갈테니. 허튼 수작 부리면 찔러버릴 거야."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참 어련하겠습니다…!"



은은히 사그라져가는 오색 불빛이 괜스레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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