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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무수정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발언자의 신원을 표기하기 위해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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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 ch.2 일상편
<주황은 고통, 파랑은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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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파랑은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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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모리 쿠키: "……그리고 이건 정말로, 그냥 추측인데."



이나모리 쿠키는 잠시 긴 하품을 뱉고는,



이나모리 쿠키: "그 의안 문제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서, 당신과 당신 친구들의 현실의 몸…."

이나모리 쿠키: "이미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 할아버지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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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에서의 4일차, 살인게임 8일차.>

<백화점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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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키치 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주름이 뭐? 하하. 이나모리, 역시 잠이 좀 부족한 것 같은데."


아야키치 슌은 쌍꺼풀 있는 눈매를 가늘게 구부리며 가볍게 웃음지었다. 곤란한 이야길 듣거나 무슨 대답을 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을 때 그는 곧잘 이렇게 얼버무리곤 했다.

하지만 이나모리 쿠키는 그 웃음을 웃음으로 받지 않았다.


이나모리 쿠키: "뭐…. 농담으로 받아들일 거라면 나도 더 신경쓰지 않아도 되지만…. 선심 써서 풀어준 정보를 그렇게 거들떠도 보지 않는 건 좀 기분나쁨. 정보의 가치를 모르는 인간."

아야키치 슌: "아하하…. 선심이라니 그것 참 감개무량하긴 하지만…. 다짜고짜 그런 말을 해도, 이해가 안 가는데…?"

이나모리 쿠키: "이해를 못 하면 그냥 받아들이셈. 당신은 꼬부랑 할아버지. 흰머리랑 검은머리는 꼬부랑 할머니."

아야키치 슌: "아니 그러니까 무슨…. 아, 언어능력이 퇴화하는 느낌이야…. 좋아. 알겠어. 알겠으니까 -3- 표정은 짓지 마. 일단 말을 들어볼테니까, 천천히 알아듣게 설명을 해봐."

이나모리 쿠키: "…칫. 뭔가 지고 들어가는 느낌인데에."


이나모리는 3 모양으로 내민 입술을 툴툴거리며 들고다니던 침낭으로 둥글게 몸을 말았다.

등껍질 태세로 변하려는 이나모리 쿠키의 낌새를 눈치챈 아야키치 슌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구심을 품던 사람이 맞는지 금세 저자세로 돌변해 싹싹 기었다.


아아키치 슌: "아이, 그러지 말고…."

이나모리 쿠키: "좋아. 대신에 조건이 있음."

아야키치 슌: "말해봐."

이나모리 쿠키: "모노쿠마 크레딧. 벌어둔 거 절반 내놓으셈. 군것질거리 살 돈이 부족해서. 앞으로 버는 크레딧도 마찬가지."

아야키치 슌: "그딴 거 전부 긁어가도 좋으니까 썩 털어놓기나 하셔. ……자, 모노쿠마 뱅글로 입금 마쳤어. 으이그, 그런거나 먹으니까 키가 안 크지…."

이나모리 쿠키: "흐음…. 입금 확인. 좋아. 그러면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하나…. 그래."

이나모리 쿠키: "방금 흰머리 할망구의 의안 이야기를 할 때, 내가 현실에선 애꾸일지라도 가상현실의 아바타는 멀쩡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지? 그것과 동일선상의 이야기임."

이나모리 쿠키: "가상현실의 아바타는 고등학생의 모습과 기억을 지니고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 피에로들에게 납치당해있는 본체는 사실 훨씬 나이든 모습일 수도 있음. 기억과 정신도 마찬가지로."

이나모리 쿠키: "당신 뿐만이 아님. 이 호텔의 손님들 대부분이, 아마도 전부 다른 나이대에 분포하고 있음. 그 중 가장 늙은이가 당신과 당신 친구들이고."

아야키치 슌: "……."

아야키치 슌: "……대충 무슨 '이론'인지 이해는 하겠는데…."



아야키치 슌은 '이론'이라는 단어에 특별히 힘을 실었다.



아야키치 슌: "대체…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허황된 결론이 나오는 거야…? 그렇게 가볍게 할 소리가 아니잖아! 현실의 내가 실버타운 입주민이라는 건!"

이나모리 쿠키: "허황되었다라. 하아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음. 아야키치 슌. 지금이 몇 년도인지 암?"

아야키치 슌: "……?"


난데없는 질문에 한 번 놀란 아야키치 슌은 지금이 몇 년도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한 번 더 놀랐다.


아야키치 슌: "그야… 20○○년이잖아. 뭐, 기억이 온전치 않으니 마지막 기억으로부터 다소 시간이 흘렀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오차범위가 클 것 같진 않은데."

이나모리 쿠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네. 흐아암. 축하해. 할아버지 확정임."

아야키치 슌: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이나모리 쿠키: "지금은 20□□년임."

아야키치 슌: "……하?"

이나모리 쿠키: "당신이 말한 20○○년으로부터 50 년은 지난 날짜…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말임."

아야키치 슌: "……거짓말."

이나모리 쿠키: "흐음.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고선 이제야 뭔가 사태파악이 되는 듯한 표정을 짓네. 좋은 얼굴임."



만족하는 듯 말하면서도, 그 잠꾸러기 꼬마 마녀는 여전히 침낭 속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이나모리 쿠키: "베가스에서의 첫째날부터 위화감을 느꼈음. 흰머리 할망구와 아리스 윈터우즈의 대화에서. 그 할망구… 윈터우즈 동화를 모르던데. 당신은 알아? 아리스 윈터우즈가 쓴 동화 중 아무 거라도 좋으니 제목을 대 보셈."

아야키치 슌: "아니…. 모르는데…? 아리스가 그렇게 유명해? 난 만화책은 몰라도 동화책 따윈 평생 손에 댄 적도 없는데…. 성장배경이 조금 특이해서, 누군가 읽어줄 사람도 없었고."

이나모리 쿠키: "흐아암. 미안한데, 윈터우즈 동화의 유명세는 책을 많이 읽고 모르고의 차원이 아님.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문맹이 아닌 이상 내용은 몰라도 책 제목이나 윈터우즈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게 정상임. 그 책들이 몇 권이나 팔려나간 줄 암? 알면 놀랄 거임."

이나모리 쿠키: "어쨌든 그 여자가 윈터우즈 브랜드를 모르고, '해리 포터'가 어쩌니 했을 때부터 느낌이 이상했음. 거기다가 이튿날 모노쿠마의 연설도 어딘가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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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정말 작정하고 프로듀스 했답니다! 왜냐하면… 이번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진짜 초고교급>들이 출연하는 <단간론파>가 될 예정이기 때문이죠! 우푸푸!

아, 정말 고생했어요, 고생했습니다! 10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초고교급>이라는 인재들을 무려 열 여섯이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요한 캐스팅에 성공한 우리 제작진을 위해 수고했다는 박수를! 우푸푸!"


-


이나모리 쿠키: "'10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초고교급들이 열 여섯이나….'라는 부분. 거기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집요한 캐스팅'. 이 부분, 대략 감이 오지 않음?"

이나모리 쿠키: "'천공호텔 단간론파'의 제작진들은 진짜 초고교급들이 활약하는 단간론파를 실현하기 위해서 '한때 초고교급이었던 사람들'을 긁어모아 고등학생 시절의 아바타를 입혀놓은 거임. 참가자들의 기억은 적당히 고교생 시절로 편집하고서."

이나모리 쿠키: "당신과 할망구가 윈터우즈를 모르는 것도, 당신네들이 고교생 나이일 땐 아직 윈터우즈 동화가 출판되기 이전이라고 생각하면 설명이 됨.

그거 암? 이 호텔 사람들, 당신처럼 윈터우즈 동화 자체를 모르거나 윈터우즈 동화의 출판 시기를 다르게 기억하고 있음. 누구는 중학생 때, 누구는 어린 시절에, 누구는 고등학생 때…. 다들 나이가 제각각이란 뜻임.

당신이 나와는 다른 연도를 살고있는 것도, 그 대단하다는 초고교급들이 서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도 설명은 됨. 고교생이라는 생물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래도 수십 년 전의 이야기라면 그다지 관심가지지 않으니까."

아야키치 슌: "……."

이나모리 쿠키: "혹시나 근거가 부족하다고 할까봐 쐐기를 박아두자면…. 자료를 찾아봤음. 라운지 층의 도서관에서. 블로그 일을 하면서 어쩐지 익숙한 뉴스를 수집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아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미제 실종사건 BEST 11'이라는 이름으로.

'벼락과 함께 행방불명된 최연소 포커 챔피언과 테러범' 이야기….

이거, 당신네들 이야기 아님?"



아야키치 슌은 받아든 신문지가 파들파들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떨리는 것을 보고서야 어느샌가 자신도 똑같이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신문지는 낡고 변색되어서 조금만 더 세게 쥐었다간 금방 부욱 찢어져버리고 말 것 같았다.



아야키치 슌: "…정체 불명의 테러범의 소행…. 납치로 추정…. 도박사 아야키치 슌 군과 카지노 매니저 카미나기 한나 양, 경호원 A 양이 실종… 실종 ○○주년?!"

아야키치 슌: "이건…. 이건 분명히 우리가 맞아…! 이 사진도! 분명 나와 한나와 이토리 씨야…! 이, 이 신문, 조작은 아닌 거지?"

이나모리 쿠키: "쿠키 블로그는 조작 없는 정확한 정보전달이 특기임. 어때. 이쯤이면 좀 믿겨질랑가…? 헤으응. 역시 나임. 멋있음, 확정."

아야키치 슌: "너… 너 이런 심각한 정보를 왜 지금껏 숨기고 있었던 거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나모리 쿠키: "숨기고 있다뉘여, 안 물어봐서 말 안했을 뿐이고, 아까도 말했지만 우연찮게 이야기 주제가 맞아서 선심 써서 싼 값에 이야기해줬을 뿐임. 되레 성질내지 마셈, 할아버지. 고혈압으로 쓰러질라."

이나모리 쿠키: "참고로 이야기하는 건데, 아직 모든 초고교급들의 나이를 조사하진 않았지만 아마 할부지가 가장 늙은 편에 속할 거임. 쿠쿡. 늙은이래요. 쿠쿡."

아야키치 슌: "…… ……."



아야키치 슌은 한참을 말 없이 헤진 신문지만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조작이나 글씨를 고친 흔적은 없었다.

물론 이 신문마저도 가상현실 속의 데이터에 불과할테지만, 이나모리 쿠키는 그 데이터를 블로그 포스팅에 사용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나모리가 고약한 취미로 잘 짜여진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건 분명히 치명적인 단서일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걸 손쉽게 인정해버릴 뻔 했던 바로 그 때, 아야키치 슌의 뇌리를 어떤 강렬한 경험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야키치 슌: "……아냐. 아무리 이런 증거가 있다 해도 네 이론은 틀렸어, 이나모리."

이나모리 쿠키: "…? 할배, 현실부정임? 증거가 있어도 틀렸다니 그게 무슨."

아야키치 슌: "이쪽이야말로 증거가 있거든! 우리가 늙은이가 아니라는 확고한 증거. 그것도 영상 자료가 말이지."

아야키치 슌: "베가스에서의 첫쩨 날, 이토리 씨가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에게 당했을 때 기억 나? 그때 모노쿠마가 보여준 영상 속에서 잠에 빠져있던 이토리 씨는 분명히 지금의 모습 그대로였어. 주름은커녕 구김살 하나 없이 지금의 어린 모습 그대로였다고."

이나모리 쿠키: "……어…라?"

아야키치 슌: "하하. 논파 완료! 아아, 놀래라 씨. 어딜 말도 안되는 가설을 들고와서 사람을 놀려먹나 했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그렇게 속여먹으려고 하냐. 윈터우즈 이야기나 이 신문지도 다 가짜지? 크레딧도 다시 내놔, 사기꾼 꼬맹이. 지금은 분명히 20○○년이라고. 꼬 맹 이. 이 몸을 속이려면 초고교급 연극배우 정도는 데리고오란 말이야."

이나모리 쿠키: "……."

이나모리 쿠키: "……어?"

이나모리 쿠키: "……어어? 어? 어어어…?"

아야키치 슌: "하핫. 인지부조화에 빠졌구만. 패배자. 강팀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란다, 거북이."

이나모리 쿠키: "아니, 잠깐 다물고 있어 보셈…. 뭔가… 뭔가가…."

타노 나타타: "뭔가가 뭔데에???? 타노도 같이 듣고싶어!!!"

아야키치 슌: "우, 우와앗!!"

이나모리 쿠키: "!!!"




갑작스레 둘 사이에 불쑥, 화려한 얼굴과 폭력적인 가슴을 들이밀며 나타난 하얀 랩 코트의 등장에 아야키치 슌과 이나모리 쿠키는 동시에 자석의 같은 극이 된 것처럼 뒤로 넘어져 쓰러졌다.

타노 나타타. 초고교급 실험부원. 도통 남과 소통이라곤 할 생각이 없던 그 괴짜 중의 괴짜가 무슨 일인지 그 둘의 대화에 호기심을 느끼고 난입한 것이었다.

깜짝 놀라 곧장 등껍질 속으로 숨어버린 이나모리. 자연스레 타노의 표적은 아야키치가 되었다.



아야키치 슌: "타, 타노 나타타…."

타노 나타타: "어엉? 내 이름 알고있네? 우리 자기, 자기소개 했던가?"

아야키치 슌: "아, 아니…. 하지만 모노쿠마 뱅글로 알 수 있어서."

타노 나타타: "아하! 그럼 제대로 인사하자. 타노는 타노야! 나타타라는 이름은 귀엽지 못하니까 타노라고 불러! 자, 악수, 악수! 아하핫!"

아야키치 슌: "우, 우와악! 그, 그래…. 반갑네."


여자애가 뭐 이리 손아귀 힘이 쎄! 라고 떠올린 아야키치는 자기 파트너를 떠올리고선 생각을 취소했다.



잠깐. 여기서 1인칭 관찰자 시점 주제에 어떻게 자꾸 등장인물의 심리를 서술하냐고 따질 수도 있는데, 내 맘이다 내 맘.

등장인물의 속마음이 내 서술과 다를 수도 있지만 일단은 되는 대로 씨부려보는 거다 이말이야.



타노 나타타: "우응, 악수했으니까 이제 친구네 친구♡. 그런데 방금까지 무슨 이야기 하던 중이었어? 굉장히 비밀스럽고 심각한 이야기 같던데. 타노도 그런 거 좋아하거든! 은밀하고 중요한 거 말이야. 아주 좋아해! 아하핫! 아핫!"

아야키치 슌: "아, 아아, 그게…. 그. 별 거 아니야. 그냥 이나모리가 이상한 말을 해서 잠시 말다툼을."

타노 나타타: "흐음. 타노한테는 숨기려는 거야? 별 거 아니라면 그냥 말해줘도 될 텐데."

아야키치 슌: "아, 아아니 그게. 별 거 아니지만… 사적인 영역이라서 그래, 아주 사적인 영역이라서!"

타노 나타타: "으으음, 사적인 영역이라….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대신에 아야키치 슌은 초등학생 몸매의 여자아이와 아주 은밀하고 사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걸로 됐어! 아하핫!"

아야키치 슌: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는데?!"

타노 나타타: "그렇게 되고 말고…. 어라, 여자애는 금세 없어졌네. 거북이처럼 생겨서는 되게 빠르잖아? 아핫, 찾아서 구워먹어버릴까~♡"

아야키치 슌: "아니, 제발 그러지 마! 그, 그보다 웬일이야? 이나모리도 그렇고, 오늘따라 보기 어려운 얼굴들이 자꾸 이쪽 복도를 지나다니네. 그것도 밤 시간에.".

타노 나타타: "우웅? 못 들었어? 폭죽 소리, 창밖에서 워낙 크게 울려대서 졸다가 깬 건데."

아야키치 슌: "폭죽…?"

타노 나타타: "응! 폭죽! 아주 크고 아름다운 폭죽! 구경하러 가고 싶지만 안개 때문에 그다지 좋은 스팟은 못 찾을 것 같아서 말이지. 그냥 깬 김에 산책 좀 다니기로 했어!

게다가 타노는 원래 야행성 인간인걸? 그게, 얼마 전까지는 웬 스토커가 딱 붙어서 활동하기 어려웠지만 말야~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그 스토커가 사라진 것 같아서, 이제 좀 본격적으로 움직여보려구! 책상 앞에만 있으면 가슴때문에 어깨도 결리고~♡ 아핫, 농담이야! 아하핫!"

아야키치 슌: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섹드립이 튀어나오는 여자애구나, 너…. 그보다 스토커라니 대체 누가 널 스토킹한다는 거야…?"



-


이 대목에서, '나'의 등장이다.


-



"……어이. 약골 도박사. 그리고 개쩌는 빅젖."


아야키치 슌: "…또 누구야?"

타노 나타타: "??? 아핫, 쟤 방금 타노를 뭐라고 부른 거야?"



서술 상의 문제가 있지만 '나'는 직접 이나모리 쿠키와 아야키치 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건 아니다.

습기에 쫄딱 젖은 꼴로 물을 뚝뚝 흘리며 백화점 플로어에 들어선 건 타노 나타타보다 조금 늦은 타이밍으로, 이나모리 쿠키와는 녀석이 타노로부터 도망가 개인실로 돌아갈 때 잠시 곁을 스쳤을 뿐이었다.

귀신같은 꼴을 하고있는 '나'의 얼굴을 살핀 건지, 아니면 나쁜 말버릇을 가진 불청객의 연이은 등장에 심기가 불편해진 건지 아야키치 슌이 살짝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아야키치 슌: "너는… 한나의 파트너? 어쩐 일로?"

"……못 봤냐?"

아야키치 슌: "?"

"…못 봤냐고, 흰 토끼 말이야."

아야키치 슌: "…무슨 일이야?"

"……못 봤군. 그럼 됐으니까 꺼져. 어이. 젖탱이. 너도 못 봤냐…?"

아야키치 슌: "야, 잠깐만! 여자애한테 그게 무슨 말투야?"

타노 나타타: "웅! 내 빅젖들이 못 봤다는데? 아하핫!"

아야키치 슌: "……."

"……도움이 안 되는 새끼들."



-



'나'는 무라츠바키 마사오미와 부둣가에 다녀온 참이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불꽃놀이.

안개를 맞고 퍼져나간 그 파열음은 온 사방에서 울렸지만 최초의 파공성의 출처가 부둣가라 여긴 무라마사와 '나'는 불길함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뛰었다.

안개의 거리를 뚫고 도착한 부둣가는 예상과는 달리 휑하니 비어있었다.

쥐새끼 한 마리도 없다. 썩어가는 게딱지들은 있어도 사람의 폭사체 따윈 어디에도 없다.

다소 출렁이는 검은 바닷물이 불꽃이 수놓았던 하늘의 흔적을 머금고 있을 뿐. 평소보다도 더 평화롭고 비어 보인다.

아무 일도 없어 다행이라고 할까, 불길함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해 불행이라고 하는 게 옳을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나'와 달리, 무라츠바키는 그 고드름같은 목소리로 조용히 일렀다.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부둣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당신은 호텔로 돌아가서 이변이 있는지 알아봐주십시오."

"안 될 소리지. 폭죽이 별 거 아니었단 걸 확인했으니까 하던 일을 마저 해야겠어. 널 감시하는 일 말야."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당신 표정만 봐도 다 보입니다, 이미 남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일엔 질렸다는 거. 정말인지, 파트너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군요. 가당치도 않은 고집 부리지 말고 이쯤 합시다."

"……날 아주 잘 알고있구만 그래. 좋아. 이쯤에서 쫑 내자. 깔끔하게 선 긋고 헤어지자고. 절대 쫄아서 보내주는 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라."


순순히 무라츠바키의 수상하기 짝이 없는 제안을 받아들인 건 그 말대로 내가 근성없는 인간언저리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흔들림 하나 없는 그의 위세에 기가 죽어서도 결코 아니었다.

감이 안좋았을 뿐이다.

타고난 감, 초고교급 재능으로부터 비롯되는 감.

그딴 건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단간론파의 팬으로서의 감이 말했다.

여기서는 이 재수없는 불꽃머리 변호사의 말을 들어쳐먹는 편이 낫다고.



호텔로 돌아갔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간 건 윈터우즈와 신지의 방이었다.

제발, 그 녀석이 방에 얌전히 있기를.

이 소란스런 쇼를 벌인 녀석이 제발 그 녀석이 아니길 빌면서 '나'는 두터운 객실 방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아리스 윈터우즈: "우… 우응…. 엣…. 카라스야마 군…? 무슨 일이시죠…? 홀딱 젖었잖아요. 물놀이 하고 오신 건가요…."


졸린 눈을 부비며 실크 파자마 차림으로 손님을 맞이한 건 아리스 윈터우즈였다.

헝클어진 머리칼에 졸음이 지배한 눈꺼풀, 아주 진지하게 물놀이 여부를 묻는 것까지. 비밀이 많은 미소녀치곤 천연끼가 너무 짙다. 마치 나만 빼놓고 물놀이를 한 거냐고 따지는 것 같다.


"나비 양반. 능글능글하고 어딘가 야해보이는 흑발 타투남은?"

아리스 윈터우즈: "우으…. 후네즈 씨요? 글쎄요…. 아직 안 들어온 것 같은데…. 아까 불꽃놀이 소리 때문에 잠깐 깼을 때에도 없었거든요."

"…안 들어왔다고."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인가?

만약 불꽃놀이를 벌인 게 신지라면, 이런 말하긴 미안하지만, 반드시 무엇 하나는 불행한 일이 생긴다. 그것도 아마 감당하지 못할 스케일로.

일단 녀석이 없다면 여기에 더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지만….



야밤중에 무방비하게 홀로 남은 은발 미소녀를 보고있자니,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어떤 욕망이 끌어올랐다.



"혼자란 말이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손은 어느새 아리스 윈터우즈의 손목을 낚아채 붙잡고 있었다.

하얗고 가늘고 또 차가워서,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생명의 기운이 희미한 하얀 나뭇가지 같았다.



아리스 윈터우즈: "꺄악?!!"


놀라는 것도 반박자 느린 윈터우즈는 붙잡힌 손목을 휙 잡아끌었지만 그 약한 힘으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약한 여자애가 발버둥치는 꼴이라니, 기분나쁜 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갑작스레 태도가 돌변한 손님의 광기서린 미소에 아리스의 두 눈동자가 공포로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아리스 윈터우즈: "이, 이거 놓으세요오…! 왜 이러세요! 아, 아파!"

"킥. 다음부턴 혼자 있을 때 누구한테 함부로 문 열어주지 마. 그러다 험한 꼴 봐, 나비 양반."

아리스 윈터우즈: "무슨 말을…?! 이… 이거 놔요!"

"윽!"



손목을 쥔 힘이 약해질 기미가 없자 윈터우즈는 현관에 있던 우산을 되는 대로 붙잡아 휘둘렀다.

그 느리고 힘없는 일격이 '나'에게 맞을 일 따윈 없었지만 손목을 놓고 물러서게 하긴 충분했다. 아리스 윈터유즈는 불청객이 물러서자마자 공포에 질린 눈으로 문을 쾅 닫았다.


뭐… 이걸로 됐다.


단간론파나 비슷한 장르에서 꼭 믿는 구석도 없이 위험하게 다니다가 살해당하는 캐릭터들이 이해가 안갔는데, 그런 꼴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까 도무지 훈수를 안 두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매운 맛으로 제대로 한 번 혼내놓으면 적어도 다음부턴 좀 조심하겠지. 단뉴비자식.



아리스에게 쫓겨난 뒤엔 '나'와 카미나기의 개인실로 돌아갔다.

카미나기의 안위를 걱정한 건 아니었다. 그저 찝찝한 꼴로 계속 돌아다니기 싫었을 뿐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 하지만 신발장이 비어있고 살짝 부풀어있어야 할 카미나기의 침대가 말끔하게 개어있는 걸 봤을 때였다.

식탁 위에는 작은 쪽지가 남겨져있었다. 쓸데없이 잘 쓴 글씨. 곁들여진 그림이 없었다면 인쇄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바르고 정교했다.



22시까진 돌아올게요.
(\(\     
(  -.- )
O_(")(")     



"…그림 존나 못그리네…."



모노쿠마 뱅글을 확인했다. 역시 이미 시간을 넘긴 지 오래다.

젠장. 흑막한테 뇌세척 당한 게 얼마 전이라고 또 어딜 사라진 거야? 이러다 흰토끼가 아니라 체셔고양이로 별명을 고쳐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99%의 불만과 1%의 걱정을 안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쪽지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걸음을 옮겼다.



아야키치 슌과 타노 나타타. 어색한 조합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보고 분명 뭔가 얻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돌아온 건 그저 모른다는 대답 뿐이었다.

대충 앞뒤 정황을 이야기했더니 의구심을 품던 아야키치 슌도 이내 표정을 잔뜩 구긴 채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자부 이토리: "아?!"


노잼 섹드립을 갈겨대는 타노를 뒤로 하고 온 연구교실 플로어에서 아자부 이토리와 마주쳤다.

어울리지도 않게 땀에 흠뻑 젖은 녀석은, 어째선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에 쥐고 있던 뭔가를 황급히 등 뒤로 숨겼다.


아자부 이토리: "흐, 크흠. …뭐야? 미식가. 이 시간에 이런 델 돌아다니고. 길 막지 말고 꺼져."

"…?"



'나'를 아직도 미식가로 불러주는 건 이 녀석밖엔 없다.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 자체도 뭔가 어울리지 않고, 아무리 성격이 과격하다지만 이렇게 다짜고짜 욕지거릴 해댈 만큼은 아니다.

상대가 윈터우즈처럼 만만한 여자애였다면 당장 손에 든 물건을 뺏어들었겠지만 멋모르고 덤볐다간 내 머리 가슴 배가 삼단분리될 게 뻔한 상대.

호기심은 잠시 접어두고 카미나기의 행방을 물었다.



아자부 이토리: "토끼녀가 안보인다고? …글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건 저녁 때 쯤인데?"

"봤다고? 어디서?"

아자부 이토리: "윽, 못생긴 얼굴 들이밀지 마 등신아! 여기서 봤어! 여기서!"

"…연구교실 플로어에서?"

아자부 이토리: "그렇다니까? 나도 내 연구교실 올라가는 길에 만난 건데, 따로 물어보진 않아서 행선지는 몰라. 플로어에서 나가는 중이었는지 들어오는 중이었는지도 모르고."



아자부 이토리에겐 동행을 요청했다. 아무래도 근육맨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고 그녀도 묘한 불안을 느꼈는지 흔쾌히 수락했다.

함께 연구교실 플로어를 더 돌아봤지만 쇼코라나 타키모리의 연구교실은 비어있었다.

남은 건 굳게 잠겨서 열리지 않는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

얌전히 문을 두드리려 손을 가져다댔을 때, 문득 어떤 위화감이 뇌리를 스쳤다.



밤이면 밤마다 빠지지 않고 흘러나오던 토미하레의 연주소리가,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이토리 쨩, 부탁해!"

아자부 이토리: "내가 네 포켓몬이냐 등신아?!"




와직!

발길질 한 번에 시원하게 부서진 문짝을 밟고 지나가자, 여느 연구교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독공연 정도는 간신히 할 수 있을만큼 작은 공간에 바이올린부터 일렉기타, 하프까지 온갖 현악기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다.

큼지막한 앰프가 웬 구닥다리 냄새 풍기는 기계에 연결되어있고, 플레이어 옆에는 둥근 판 같은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있었다.

둥근 판에는 각기 다른 날짜와 토미하레 소루의 이름이 적혀있다. 주로 수십 년 전의 날짜들이다.



"이건 대체 뭐 하는 기계야…?"

아자부 이토리: "CD랑 플레이어잖아. 것도 모르냐. 좀 구닥다리긴 하지만 어지간히 무식하구만."

"그게 뭔데 씹덕아."

아자부 이토리: "뭐긴 뭐야. 여기에 이 CD를 넣고 재생버튼을 누르면… 그 바이올린 게이 녀석, 설마 그동안 계속 이걸 틀어놓고 실제로는 다른 곳에 다녔던 건가?"

"뭔진 몰라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여기도 없으면 대체 어디에…. 저건 뭐야?"

아자부 이토리: "?"



밟고 지나온 문 아래 깔려있던 또다른 쪽지를 발견한 '나'는 그걸 집으려다 이토리에게 뺏겼다. 쪽지를 낚아챈 이토리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근시라도 있는 것처럼 가까이에 대고 소리내어 읽었다.


아자부 이토리: "<항구에서 봐요…. 당신만큼이나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보여줄게요…. 반드시 혼자…>? 뭐야 이 존나 오글거리는 쪽지는? 살짝 역한데? 누가 이걸 바이올린한테 보낸 건가?"

"'항구'라고? 하지만 항구엔 아무도 없었는데?"

아자부 이토리: "아직 쪽지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무라츠바키 마사오미가 항구에 남아있을 거야. 녀석이 뭔가 봤을 수도 있겠지."


-



그렇게 '나'는 다시 항구로 향했다. 이번엔 169cm짜리 살인병기와 그녀의 얼빠진 파트너를 대동하고서.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아, 왔습니까. 호텔 쪽에선 아무런 소식도 얻지 못했나봅니다, 파티만 잔뜩 불려서 온 걸 보니."

타키모리 유미코: "태그 A B?"

아자부 이토리: "뭐야, 당근머리는 여기 왜 있어?"


돌아간 항구에선 무라츠바키 뿐 아니라 초고교급 상담가, 타키모리 유미코가 함께하고 있었다.

습기 때문인지 평소 걸치고다니던 무스탕도 벗어던진채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검은 크롭티를 걸쳤다. 피부와 머리칼을 적신 물기 덕에 묘한 색기가 돌았다.


타키모리 유미코: "나는…."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타키모리 씨는 여러분보다 살짝 앞질러 항구에 도착한 참입니다. 상담을 마칠 때면 늘 연구교실에서 들려오던 파트너의 연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군요. 이 앞쪽에서 내려오시는 걸 제가 직접 봤습니다."

타키모리 유미코: "…도와주는 건 고마운데, 내 말은 끊지 마. 그 말대로야. 그 왕재수녀석, 대체 어디를 간 건지…. 에휴, 물가에 애 내놓은 심정이라니까."

아야키치 슌: "토미하레가 없어졌다고? 이쪽은 한나가 사라져서 찾는 중이었는데…."

아자부 이토리: "토미하레가 사라졌다는 것도 이미 말했어, 바보키치."

"변호사 양반. 항구에서 뭔가 발견한 건?"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흠…."


녀석은 대답 대신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돌리는 선택을 했다.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몇 가지 발견한 특이점은 있지만 아직 그 의미는 모르겠군요. 일단은 실종자들을 찾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수색인원은 여기에 있는 다섯 명이면 충분할 것 같군요."

"……젠장."





-



자정이 넘어 부둣가에서 시작된 생존자 수색은 온 어촌을 들쑤시고 뒤집고서도 모노쿠마 뱅글의 시각으로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끝을 봤다.

다섯 명의 수색자들은 다시 부둣가에 모였고, 이미 지칠대로 지쳐 온몸에 달라붙은 습기를 닦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토미하레 소루와 카미나기는. 다른 녀석들에겐 알리지 않았지만 신지는 어디서 뭘 꾸미고 있는걸까.



그때 안개 덮힌 바닷가에서 의문의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아야키치 슌: "잠깐만? 이거 무슨 소리야…?"

시가라토 유즈: "뭐긴 뭐야, 쓰레기 수거선이 돌아오는 소리지…. 흐음. 관찰력이 부족하네"

"? 너는."


담뱃재를 아무렇게나 툭툭 털며 부둣가로 걸어내려오는 시가라토 유즈. 초고교급 르포기자.

이 이른 시간에 그녀가 항구를 찾은 이유를, '나'와 당신은 알고있다.


시가라토 유즈: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매일 새벽 확인하고 있었어. 저 배, 매일 같은 시간,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쓰레기를 수거하고 돌아오는 무인선이거든. 그런데 너희 피라미들은 무슨 일로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거지…?"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가라토는 자기 할 일을 하러 정박한 쓰레기 수거선에 다가갔다.

수색조의 나머지 네 사람도 머뭇거리다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그녀를 따라갔지만, '나'는 지친 데다 인내심이 바닥나서 방파제에 몸을 뉘이고 오징어처럼 축 늘어졌다.

저 쓰레기더미에서 뭘 찾아내겠다는 건지, 저 여자도 태그 B도 당근머리 여자도 무라츠바키도 다들 어지간한 멍청이구나 싶어 한숨만 푹 푹 나왔다.



젠장. 멍청한 토끼.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지금까지 안 보이는 거라면 99% 사건에 엮였다고밖엔 생각 못한다고.


죽었거나, 혹은 죽였거나.


아아, 어차피 뭔가 저지른 거라면 차라리 '죽임당한 쪽'이었으면 좋겠네.


어설프게 살인 따윌 저질렀다면 파트너인 내가 억울하게 휘말려버리잖아….


아, 나른하다. 습하고 춥지만 나른해. 피곤해서 졸음이 쏟아진다.


눈꺼풀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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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아아아아아악!!!!


"…!!!"



안개를 찢는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몸이 반사적으로 일으켜졌다.

아마 타키모리 유미코였다. 목소리는 쓰레기 수거선 쪽에서 들려왔다.

뭐지. 무슨 일이야?



아야키치 슌: "안돼!!!!!! 안돼, 안된다고! 안돼!!"



안 된다니, 뭐가 안되는데?



아자부 이토리: "… 어… 언… 언ㄴ…?"



뭐?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시가라토 유즈: "……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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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쏟아내던 입을 틀어막은 타키모리 유미코.

머리를 쥐어뜯으며 짐승처럼 절규하는 아야키치 슌.

무슨 말을 뱉으려다 그대로 얼어붙어버린 아자부 이토리.

'그것'을 내려다보다 이윽고 고개를 휙 돌리는 시가라토 유즈와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그들 사이를 지나쳐 쓰레기 수거선 앞에 섰을 때 쯤, 어떤 귀에 익은 알람음이 어딘가의 스피커에서 울려퍼졌다.


<띵, 똥!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전파합니다,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일정 자유 시간 후, 학급 재판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오. 그렇군. 시체 발견이었군.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동요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쓰레기 수거선이 건져올렸으니 분명 익사체거나 물에 불어있겠군. 보기 편치만은 않겠어.


걸음 걸음을 내딛어 더이상 내딛을 곳이 없어졌을 때 눈앞엔 수거선이 뱉어놓은 해양 쓰레기가 무더기로 쏟아져내려 있었다.


어렵게 찾을 필요도 없이 곧장 내려다보였다. '그것'이.

'그것'이 되어버린 그 녀석이.




여기저기 엉킨 귀신같이 긴 은발에 붉은색 재킷, 자주색 치마를 입은 그 짓무른 시체가, 녹슨 선체와 닻줄 사이에 대충 던져놓은 빨랫감처럼 비틀린 채 힘없이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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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죽임당한 쪽'으로 갔으니, 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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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 천공호텔 단간론파 ch.2 비일상편.


《까마귀가 싸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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