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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무수정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발언자의 신원을 표기하기 위해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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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 ch.2 비일상편
<까마귀가 싸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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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체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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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엉킨 귀신같이 긴 은발에 붉은색 재킷, 자주색 치마를 입은 그 짓무른 시체가, 녹슨 선체와 닻줄 사이에 대충 던져놓은 빨랫감처럼 비틀린 채 힘없이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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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죽임당한 쪽'으로 갔으니, 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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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흠뻑 불어터진 시체라는 건 정말로, 정말로 보기가 역겨웠다.

퉁퉁 붓고 변색된데다 냄새도 풍기고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험한 꼴이 된 그것은 마치 재능없는 아이가 미술시간에 빚어놓은 조악한 찰흙인형에 카미나기의 옷을 입혀놓은 것만 같았다.

물을 먹은 머리칼은 색이 빠진 해조처럼 징그럽게 엉켜있고 쇠사슬 같은 것이 칭칭 묶인 팔다리는 뼈관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이상한 각도로 꺾여있다.

더이상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역겹다. 나름 비위가 세다고 생각했던 '나'도 그만 고개를 훔쳐버렸다.



"…겁대가리 없이 싸돌아다니더니. 시체 상태는 또 왜 이래? 아, 마지막 퇴장까지 속만 썩인다니까."



시체를 발견한 '나'의 입에서는 이런저런 방정맞은 조롱의 말들이 줄줄 쏟아져나왔다.

아마 살면서 만들어온 썩을 방어기제 때문이 아닐까.

카미나기가 살해당한 쪽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긴 하지만, 곧 현실세계의 피에로들에게 부관참시당할 여자애의 익사체에 저주를 퍼부을 이유따윈 없었다.


하필이면 물에 빠져 죽다니, 재수없게…. 물귀신이라도 되려나?



아야키치 슌: "한나가… 한나가 죽다니… 하필이면 한나를…!"

팔과 다리를 부들부들 떨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무너져내린 아야키치 슌.

고장난 톱니바퀴처럼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입을 가까스로 틀어막은 아자부 이토리.


시체로부터 뒤돌아선 채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가 힐끔 힐끔 뒤를 돌아보는 타키모리 유미코.

그리고 여유롭게 부채를 부치며 달라붙은 습기를 날려보내는 무라츠마키 마사오미, 담배를 피는 시가라토 유즈가 있었다.


철썩, 철썩…. 파도가 친다, 검은 파도가.


시체 발견 방송을 들은 플레이어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녀석도, 졸린 눈을 부비다가 번쩍 뜨인 녀석도, 심지어는 콧노래를 부르며 룰루랄라 발랄하게 뛰어오는 녀석도 있었다.

어디 짱박혀 있었던 건지 행방이 묘연했던 신지 녀석도 뒤늦게 새카만 머리칼을 긁적이며 등장.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 둘….

하나는 시체인 카미나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타키모리 유미코의 파트너, 초고교급 현악부원 토미하레 소루였다.



타키모리 유미코: "아이,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얘는 대체 어딜 간 거야…! 하여간에 남자가 여리여리한 게 믿음직스럽지 못해선…! 흐윽…. 한나 양…."

이시미네 칸: "남자가 꼭 믿음직스러워야 합니까, 타키모리 씨?"

타키모리 유미코: "윽, 안경거치남? 벌써 깨어났어? 그 꼴로 돌아다녀도 돼?"

이시미네 칸: "제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남자가 좀 여리여리할 수도 있죠. 남자가 여자보다 믿음직스럽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여자가 당당할 수도 있고 남자보다 능력있을 수도 있는…."

타키모리 유미코: "아 좀!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누가 얘 입 좀 막아줘!"


도서관에서 당한 습격의 후유증으로 골절부위에 깁스를 한 채 낑낑대며 나타난 이시미네는 지겨운 줄도 모르고 등장하자마자 잔소리를 시작했다.

피살 미수가 생각보다 정신적으로는 약이 됐던 걸까?

영혼 없는 얼굴로 서적만 정리하던 이전과는 달리 한결 생기와 하찮음이 회복된 면상이었다.

잔소리는 짜증나지만 대책없이 풀죽어 있는 것도 꼴뵈기 싫으니 일단 잘 된 일로 쳐두자.



이시미네 칸: "끄응, 그보다 이번에 살해당한 건 카미나기 씨인가요?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옷차림으로 보나 하얀 머리칼을 보나 그런 것 같군요."

이나모리 쿠키: "…할망구, 죽었네. 뭐, 이걸로 한 챕터 더 목숨 연장인가아. 피쓰."

이시미네 칸: "에휴, 그게 사람이 돼서 할 소립니까? 아무리 상식이 없기로서니와. 그리고 카미나기 씨가 죽긴 왜 죽습니까? 그래도 본체는 살아있을 겁니다. …피에로들이 손을 대기 전까지는요."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다. 가상현실 속에서 살해당한 그녀는 현실에서 속수무책으로 다시 한 번 살해당할 운명이다.

이 아이러니하고 기괴하기까지 한 뭄장은 시체 앞에 모인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무력함을 다시금 일깨워주었고, 어떤 이들에겐 차가운 절망을, 다른 이들에겐 불씨와도 같은 항쟁심을 선물해주었다.



시가라토 유즈: "뭐…. 어떻게 됐든 두 번째 학급재판이군. 누군가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살인을 저질렀고, 이젠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범인을 죽여야 할 차례라는 거지."

키쇼: "죽인다는 표현은 좀 무섭슴다…. 탐정 놀이 정도로 생각하면 안되겠슴까? 저흰 그냥 범인 잡는 역할에 충실한 배우일 뿐인 검다…. 에휴, 이렇게 말해도 힘빠짐다. 카미나기 씨, 좋은 분이었는데."

시가라토 유즈: "사건에서 감정은 배제해, 얼간이. 지금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피해자를 바라봐야 한다고."

키쇼: "예, 예에. 그나저나… 시체가 발견됐고, 사람이 이 정도로 모였으면…. 슬슬 나타날 때 아님까? 모노쿠마, 아니, 이제는…."


모노사메: "그야 물론 이 모노사메 님을 찾는 거겠지? 느 푸 푸 풋!!!"




모노사메는 상어보다는 범고래에 가까운 인상으로 검은 바다 속에서 튀어올랐다.

프리 윌리라는 제목이었던가.

옛날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힘차게 물가를 박차고 나온 모노사메는 갓 해동한 참치처럼 꼬리를 펄떡이며 그 우렁찬 목청을 자랑했다.

그보다 물고기라는 생물, 말을 할 수 있었던가? 초음파를 내는 고래라면 몰라도.



모노사메: "느푸푸풋, 좋은 새벽일세! 새벽이라곤 해도 어촌은 하루종일 밤이지만. 학생 제군들! 이것 참 학급재판 하기 좋은 날이로구먼!"

"으, 뭔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역시 어류는 마스코트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까 모노쿠마 데려와라."

모노사메: "어류가 뭐 어쨌다는 말인가! 털냄새 풍기는 더러운 포유류보다야 어류가 훨씬 깔끔하고 위생적이지 않나? 까마귀 군.

그보다 제군들은 참 잘도 살인을 저질러주는구먼! 누가 재촉한 것도 아닌데 말일세. 첫 번째 살인은 4일차 저녁에, 이번에는 지난 학급재판으로부터 정확히 만으로 나흘 걸렸다네. 이런 페이스대로라면 '동기' 같은 건 보여줄 틈도 없이 우수수 죽어나가겠구먼! 느푸풋!"



싸구려 도발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살인에도 적절한 페이스라는 게 있다면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정말로 그것에 잘 맞춰나가고 있다.

4일마다 일어나는 살인, 그것도 다른 특별한 자극이나 계기 없이 이미 주어진 환경만으로.

첫 번째 살인은 그것이 TV 쇼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두 번매 살인은 아마도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카미나기를 살해하게 된 정확한 경위는 범인을 잡아내고 나면 알 게 될 뿐이지만, 근본적으로 우린 예나 지금이나 주최자의 의지를 아주 잘 쫓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건 단순한 '나'의 의견인데, 여태까지의 단간론파 중 '천공호텔 단간론파'만큼이나 서로에 대한 불신과 경계가 팽배한 작품은 드물었다.

지금 이 시체를 발견한 이들의 반응만 살펴봐도 그렇다.

시체를 보고 슬퍼하는 이는 있을지언정, 자신들 중 누군가 카미나기 한나를 살해했음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시가라토의 말마따나, 흰토끼를 살해한 녀석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피에로들 곁으로 보내버릴 수 있으니까.




"…흠. 이봐. 모노사메."

모노사메: "음? 질문이 있는 건가, 무재능 군?"

"질문이라기보단 확인 같은 건데. 카미나기는 살해당했으니 지금 당장 피에로 녀석들에게 목이 따이는 건가? 멧돼지처럼 푹푹푹?"

모노사메: "흐으음…. 카, 카미나기 양 말인가ㅡ 그게… 말일세."

"어차피 죽일 거라면 지금 죽이는 게 좀 더 진행이 깔끔하지 않겠어? 나중엔 범인을 처형시켜야 한다고. 직전에 못생긴 여자의 멱을 따는 장면 따윌 보여주면 흥이 식잖아."

모노사메: "그, 그게에…. 잠깐, 확인 좀…."

"……?"

모노사메: "…흐음. 흐음흐음. 느푸푸…. OK. 접수 완료."


잠깐 누군가와의 교신을 통한 듯한 모노사메가 턱주가리를 끄덕거렸다.


모노사메: "'바깥 세계'에서 무재능 군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아왔다네. <피해자 살해식은 검정 처형식과 동시에 진행하겠음!> 이라고. 변동되지 않을 사안이니 더 물고 늘어지지 말게!"

"…흐응. 그렇단 말이지. 좋아. 덕분에 저기 저 도박사 군은 잔뜩 애가 타겠는데? 친구의 현실 시체를 확인하지 못해서 말이지."

아야키치 슌: "……."



아야키치 슌은 여전히 힘없이 고개를 떨군 채 표정을 숨기고 있었다.

동료를 잃은 마음이야 '나'도 이미 겪어본 바지만 그 크기를 감히 비교하는 건 너무나도 천박한 짓이 아닐까 싶다.



모노사메: "자, 그러면 이번 사체의 개요를 간략하게 정리한 '더 모노사메 파일'을 두고 가겠네! 모노사메 파일은 기본적으로는 제군들의 조사를 돕기 위해 제작되지만 형평성을 위해 검정의 의도를 반영하여 내용이 첨삭될 수 있다는 점 이해 바라네! 그럼 학급재판에서 보겠네!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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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모노사메 파일. #1


시체 발견 현장은 부둣가의 쓰레기 수거선.

보존 상태가 나빠 사망 추정 시각은 파악할 수 없음.

몸싸움의 흔적 존재.

사인은 밧줄 같은 물건으로 목을 졸려 교살, 목뼈가 부러져 사망한 것으로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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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나, 이건?"


정보가 누락된 것도 정도가 있지, 이번엔 정도가 심하다….

사체 발견 장소와 사인을 제외하고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심지어 피해자의 이름마저 적혀있지 않은 휑한 파일이었다.

단간론파 오리지널의 이쿠사바 무쿠로가 떠오를 만큼 대충대충인 모노쿠마, 아니, 모노사메 파일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참고할 만한 건 사인인 교살 정도인가. 물에 빠져있긴 해도 익사체가 아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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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사메 파일 #1}
시체 발견 장소는 부둣가, 사인은 목뼈 골절.
유난히 성의없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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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키치 슌: "……."



읽어보기 좋도록 여러장 만들어 뿌린 모노사메 파일. 겨우겨우 그 중 하나를 집어든 아야키치 슌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걸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눈빛은 아직 살아있다. 카미나기의 눈동자가 보름달 같다면 녀석의 눈은 황록색으로 빛나는 머나먼 성계의 항성같다.

저 짧은 내용물에서 뭘 찾아내기라도 기대하는 걸까?

그래봤자 카미나기 한나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다는 걸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걸까?

녀석의 외계 별 같은 눈동자가 핵융합을 멈추고 싸늘하게 식어버릴 순간이, 아주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모노사메 파일을 확인한 다음은 당연히 시체를 건드려볼 차례였다.

그런데… 아무리 해야하는 일이라곤 해도 영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으, 이건 좀 싫은데. 차라리 불에 탄 시체는 새카매서 안 보이기라도 하지. 치킨도 물에 빠진 것보단 구이나 튀김이 좋은데."

아자부 이토리: "미식가. 계속 그딴식으로 입 놀렸다간 윗턱과 아랫턱이 평생 작별하게 될 거야."

"아. 혼잣말이었는데 들렸나봐."



역시라면 역시겠지만, 누구나 가까이 가기도 꺼려할 익사체에 누구보다 먼저 손을 댄 초고교급 보디가드는 으르렁대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사체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고철더미를 힘으로 들어낸 그녀는 마치 키우던 토끼라도 죽은 것 마냥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체를 바라봤다.



아자부 이토리: "…미안하지만, 몸을 좀 조사할게."


전부터 느낀 부분이지만 유난히 망자에 대한 예를 철저히 지키는 녀석이다.

어차피 시체에 손을 데기도 싫겠다, 그녀가 조사하는 모습을 잠시 먼 발치서 관찰했다.

아자부 이토리는 일단 시체를 속박한 쇠사슬을 벗겨내고 얼굴에서 달빛을 받아 은은한 푸른빛을 띄는 머리칼을 걷어냈다.

그러자마자 움찔, 심각하게 훼손된 시체 안면부를 보고서 그녀도 나도 호흡하는 방법을 잠시 잊었다.

물에 빠진 시체는 보통 다 이렇게 되는 건가?

붓다 못해 아예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내린 얼굴엔 눈도 코도 입도 달려있지 않았다.

물고기가 파먹기라도 한 건지, 바닷물 성분이 사실 염산이라도 되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 고의로 박살내놓기라도 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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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된 안면}
시체의 얼굴은 보존상태를 감안하더라도 심하게 훼손되어있다.

<쇠사슬}
시체의 다리에 묶여있던 무거운 쇠사슬.

<인상착의}
시신의 머리카락과 인상착의를 봤을 때 시신의 주인은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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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걸 가까이서 봤다간 며칠간은 아무것도 못 먹을 것 같다고 생각했건만, 그런 감상이 무색하도록 시체에 또 한 명의 여자가 다가갔다.

타키모리 유미코. 초고교급 상담부원이자 카미나기와는 꽤 친했던 여자다.



타키모리 유미코: "이, 이토리 양? 시체에 뭘 하고 있는 거야?"

아자부 이토리: "상담부? …태클 걸 기운이 남았으면 거들기나 해. 나라도 이런 걸 오래 붙잡고 있긴 힘들어."

타키모리 유미코: "나, 나는…. 미안, '그런 걸' 만지고 싶진 않아서…."

아자부 이토리: "…나 참. 그럼 꺼져. 나라고 해서 좋다고 이러는 줄 아나."

타키모리 유미코: "그, 그게…. 하아. 이토리 양, 오해하지 말고 들어. 상담자로서 하는 조언인데, 지금 이토리 양의 정신상태에 그런 자극은 너무 위험해."

아자부 이토리: "…뭐랬냐, 지금?"

타키모리 유미코: "화,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어! 내겐 상담자로서 내담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토리 양은 수 년 간 직접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어왔고, 지금은 거의 터지기 직전의 댐 같은…. 꺗?!"

아자부 이토리: "아가리 함부로 놀리지 마. 알량한 동정심이라도 구하려고 네 그 웃기는 상담 놀음에 응해준 게 아니니까. 알겠어?"

타키모리 유미코: "윽…."

아자부 이토리: "…저리 꺼져. 시체를 볼 자신이 없다면 뭔가 쓸모있는 정보라도 주워서 가져오라고."



타키모리는 씩씩거리며 분을 삭히다 결국엔 휙 뒤돌아 성큼성큼 달아나버렸고 이토리는 뭐라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더니 다시 시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얻을 게 많은 대화였다.

타키모리 유미코의 상담에 아자부 이토리도 참석했다. 그리고 그 유리 멘탈에 벌써 금이 가기 시작한 모양이다.

내담자를 보호하려는 타키모리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지금은 누구 멘탈이 부서지든 가루가 돼서 자살을 하든, 이용해먹을 대로 이용해먹고 뼈까지 발라먹는 편이 좋다고, 그렇게 충고해주고 싶다.



본격적으로 흰토끼의 몸을 만지기 시작한 이토리의 표정이 점차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비위가 강해도 물렁물렁해진 유기물 덩어리를 주무르다보면 저럴 수 밖에 없겠지.

시체에서 더 얻을만한 정보도 없겠다, 이만 안쓰러운 토끼 시체와는 작별하자.

잘 가라, 흰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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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바나 츠나요시: "끄오오옷… 끄오오옷… 끄오오오옷차!!"

타노 나타타: "냐하핫! 화이팅, 화이팅! 일해라 핫산!"

"……뭐하는 거야?"



초고교급 대장장이이자 근육질 쾌남, 타치바나 츠나요시의 꼴사나운 기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부둣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냉동 창고였다.

어획한 물고기를 저장해놓기 위한 시설…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는 곳이긴 한데.

건틀릿을 착용한 타치바나가 안간힘을 쓰게 만든 건 굳게 잠겨있는 두꺼운 철문이었다.

작게 벌어진 틈새로도 몸이 움츠러들 만큼의 냉기가 스며나오는 수상한 공간.

이미 영하의 기온인 곳에서 저 정도의 냉기를 뿜어내려면 얼마나 차가워야 하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결국 문을 여는 데엔 성공했지만 타치바나와 타노, 그리고 '나'까지 모두 추위에 약한 옷차림(천 하오리, 미니스커트, 반바지)이었기에 정작 창고에 진입한 건 추운 지방에서 살았다는 아리스 윈터우즈와 이시미네가 합류한 뒤였다.

둘이 문 속으로 걸어들어간 후에는 서로 멀리서 큰 소리로 교신을 나눴다.



아리스 윈터우즈: "우아아아! 춥네요, 여기! 어릴 때 살던 곳보다도 훨씬 추워여어!"

이시미네 칸: "윽. 춥다…. 하지만 필요하시다면 제 겉옷이라도 벗어드리겠습니다! 아리스 님!"

아리스 윈터우즈: "아, 그, 네에…."

"어이, 안경찐따! 너랑 작가양반은 가망 없으니까 개수작부리지 말고 조사나 똑바로 해!!"

이시미네 칸: "으윽. 당신은 조용히 하십쇼! 반바지 입었다고 조사도 남한테 떠넘긴 사람이 뭐가 그렇게 당당합니까? 그것도 깁스 둘둘 만 환자랑 몸도 약한 아리스님한테!"

아리스 윈터우즈: "…이시미네 씨,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학급재판에서는 솔직히…. 저는 별로 쓸모가 없잖아요? 헤헤…."

이시미네 칸: "무슨 말씀을?! 아리스 님은 존재만으로도 밝게 빛나십니다! 저 우매한 자들이 머리 좀 굴린다고해서 어찌 아리스 님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안경잽이!"



하여간, 누가 보면 저 둘이 파트너인줄 알겠다. 주책도 정도껏이지.



"뭔가 보이는 건?"

이시미네 칸: "글쎄요. 전혀…? 얼음이 정말 많긴 하군요. 그냥 얼음이 아니라… 드라이아이스인 것 같고."

아리스 윈터우즈: "문은 누군가 밖에서 잠금장치를 망가뜨려놔서 열리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요…."

이시미네 칸: "으, 으으…. 흐드드드…. 물고기를 실어나를 수 있는 카트…도 여럿 있군요. 이외에 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타치바나 츠나요시: "누군가 그곳을 방문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소만…. 좋소.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다면 얼른 돌아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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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아이스 창고}
다량의 드라이아이스와 카트가 구비된 창고.
잠금장치가 고장난 것으로 보아 누군가 다녀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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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 창고를 벗어나 부둣가로 돌아왔다. 추위라는 건 역시 상대적인 것이라서, 싸늘하게만 느껴졌던 바닷바람도 은은한 봄바람처럼 따뜻했다.

이번엔 쓰레기 수거선이 아닌 다른 배들이 정박해있는 나룻터를 살폈다.

관찰력의 한계인지 별다른 위화감은 느끼지 못했지만, 때마침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고있던 이나모리가 눈에 밟혀 녀석의 침낭과 수면안대를 뺏고 협박했다.

대신 정보를 모아주지 않으면 평생 낮잠을 못 자게 만들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이나모리는 궁시렁궁시렁 짜증을 내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조사라기보단 알 낳아둔 곳을 잊어버린 거북이가 모래사장을 두리번거리는 모양새였지만, 역시 초고교급 랭킹메이커다운 정보 탐색 능력으로 금세 조사를 끝마쳤다.



이나모리 쿠키: "…여기, 이 조각배랑 어선 말인데. 누군가 타고 나갔던 것 같은데."

"흐응. 좀 더 자세히."

이나모리 쿠키: "…우리 구피(침낭)와 유미(안대)는 꼭 돌려줘야 해. 약속 어기면… '세 번째'는 너야. 애송이. 데쓰."


이나모리는 입을 뿌우 -3- 내밀고는 목을 슥슥 긋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전혀 위협은 되지 않았다. 전혀.


이나모리 쿠키: "당신이 주의깊게 살펴봤을 것 같진 않지만, 이 배들, 원래는 나룻터의 말뚝에 쇠사슬로 묶여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쇠사슬은 온데 간데 없고, 닻도 끊어져있는 데다가 낚싯배엔 키도 꽂혀있지. 누군가, 그것도 꽤 최근에 배를 탔다가 들어와서 급하게 떠난 거야."

"…하긴, 시체가 해양 쓰레기들 사이에서 발견됐으니 범인이 배를 탔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군."


'나'는 보잘것 없는 기억력으로 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무라츠바키와 처음 파공성의 근원을 찾아 항구에 왔을 때, 나룻터에는 배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어쩐지 텅 비어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기분탓인 것 같기도 하고….

아, 젠장.

흰토끼였다면 최소한 기억 문제로 고민하진 않았을텐데. 한심하다.



"옛다. 구피는 돌려주지."

이나모리 쿠키: "오오오… 에. 유미는?"

"에이, 뭔가 더 없어? 겨우 범인이 배 탔다는 것만으론 좀 아쉽지. 그 정돈 민간인 평균 지능이라 자부하는 나도 알 수 있겠다."

이나모리 쿠키: "끄으…. 저주해서 죽인다, 애송이이…."

"저주는 친구한테 자주 당해봐서 면역이야. 다른 방법을 쓰도록 해."

이나모리 쿠키: "쳇…. 애송이. 저기 저거 보여? 파도에 떠밀려 온 쓰레기 말이야."


녀석은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어패류 사체가 가득한 뻘을 가리켰다.

대체 뭘 보라는 거야, 꼬맹이?


이나모리 쿠키: "저기 저 빈 상자처럼 보이는 거…. 냉동창고에 있는 물건 아니야?"

"엥? 그런가?"


과연, 가까이 다가가보니 방금 냉동고에서 봤던 그 카트가 맞았다.

끊어진 노끈 같은 게 연결되어있고 내용물은 텅 비어있다. 약간 파손된 것 같기도 하다.


"음…. 확실히 그렇긴 한데, 넌 이게 냉동창고 물건이란걸 어떻게 아냐? 꼬맹아?"

이나모리 쿠키: "누구와는 다르게 조사만큼은 철저히 하그등여? 재능 없는 티 내시나. 애송이."

"거 말 참 예쁘게 하네."

이나모리 쿠키: "아아앗?! 유미! 아, 안돼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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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모리의 증언}
누군가 낚싯배와 조각배를 타고 나간 흔적이 있다.

<떠밀려온 카트}
해안가에 밀려온 카트. 냉동창고에 있는 것과 같은 물건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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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모리 쿠키의 안대를 저 바닷가에 냅다 던져버리고 도망치는 길, 곧게 선 등대가 새삼스레 눈에 밟혔다.

그러고보니 어촌에서 가장 수상한 지형지물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이 등대였지.

입구에 잠금장치까지 되어있는 주제에 별다른 힌트를 얻지 못하는 게 영 답답했는데….

혹시나 해서 살펴봤지만 잠금장치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열려면 다섯자리 비밀번호, 혹은 열쇠가 필요한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범인이 이 등대를 자유자재로 열고닫을 수 있다면….

아니, 증거 인멸을 할 거라면 배를 타고 나가서 바다 한복판에 버리면 될 뿐이다.

이 등대엔 별 의미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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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없는 등대?}
굳게 잠겨있는 등대.
아무런 힌트도 찾지 못해 의미를 알기 어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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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를 다 뒤지고 나선 서둘러 호텔로 향했다.

카미나기를 찾아다닐 때 발견한 쪽지들을 챙기고,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을 좀 더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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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교실의 쪽지}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서 발견된 쪽지.
'항구에서 봐요…. 당신만큼이나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보여줄게요…. 반드시 혼자…'

<개인실의 쪽지}
인쇄했다고 해도 믿을만큼 바른 글씨로 쓰인 글씨. 그에 비해 그림실력은 형편없다.
'22시까진 돌아올게요.
(\(\     
(  -.- )
O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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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 '불꽃놀이'라는 단어가 끼어있는 쪽지가 발견된 이상 수상하게 여길 수밖엔 없다.

그러고보니 그 녀석, 시체발견 방송이 울렸는데도 시체를 보러 나타나지 않았었지….


그의 연구교실을 찾은 사람은 아직 '나' 말곤 없는 듯 했다.

CD 플레이어…라고 했었나?

어떻게 쓰는 물건인진 모르지만 작동원리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원판 가운데 하나를 집어 기계에 넣고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고장이 난 건가 싶어 이리저리 뒤집어보다 원판을 거꾸로 넣었다는 걸 깨달았다.

기계 속의 원판이 빙글빙글 돌아가자 곧 바이올린 연주가 흘러나왔다.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음질이지만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연주력이 단점을 덮고도 남는다.

바흐와 모차르트 같은 거장들의 음악이 흘러가고 지식 없이는 잘 알아듣지 못할 곡들도 싱그러운 꽃과 같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비록 영상 없이 음성 뿐이지만 이 곡들의 연주자를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곡을 연주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초고교급 현악부원 뿐일테니까.

구닥다리 기계 치곤 볼륨조절은 꽤 자유로워서 충분히 문 밖까지 들리고도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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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플레이어}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 있던 물건. 구닥다리지만 볼륨은 꽤 큰 편이다. 구비된 CD는 토미하레 소루의 연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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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연주나 듣고 있을 때가 아니지만 홀린 듯 듣다보니 어느덧 학급재판 시간이 다가왔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수집한 증거가 적어도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젠장. 밖에서 볼 땐 쉽게만 보였던 코토다마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니.

지금이라도 좀 더 빡세게 조사를….



<<아아, 아아! 자유 시간이 종료되었다네! 잠시 후 학급재판을 개정할 예정이니, 제군들은 천공 모노쿠마 호텔로 집합해주길 바라네! 이상!>>



…아. 좆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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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한 코토다마 목록



<모노사메 파일 #1}
시체 발견 장소는 부둣가, 사인은 목뼈 골절.
유난히 성의없는 내용이다.


<손상된 안면}
시체의 얼굴은 보존상태를 감안하더라도 심하게 훼손되어있다.


<쇠사슬}
시체의 다리에 묶여있던 무거운 쇠사슬.


<인상착의}
시신의 머리카락과 인상착의를 봤을 때 시신의 주인은 분명히….


<드라이아이스 창고}
다량의 드라이아이스와 카트가 구비된 창고.
잠금장치가 고장난 것으로 보아 누군가 다녀간 것 같다.


<이나모리의 증언}
누군가 낚싯배와 조각배를 타고 나간 흔적이 있다.


<떠밀려온 카트}
해안가에 밀려온 카트. 냉동창고에 있는 것과 같은 물건으로 보인다.


<의미 없는 등대?}
굳게 잠겨있는 등대.
아무런 힌트도 찾지 못해 의미를 알기 어려운데….


<연구교실의 쪽지}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서 발견된 쪽지.
'항구에서 봐요…. 당신만큼이나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보여줄게요…. 반드시 혼자…'


<개인실의 쪽지}
인쇄했다고 해도 믿을만큼 바른 글씨로 쓰인 글씨. 그에 비해 그림실력은 형편없다.
'22시까진 돌아올게요.
(\(\     
(  -.- )
O_(")(")     '


<CD 플레이어}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 있던 물건. 구닥다리지만 볼륨은 꽤 큰 편이다. 구비된 CD는 토미하레 소루의 연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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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직… 칙…. 지직….




???: "……."




낯이 익은 어둠이다.


어둠 속에는 일시 정지된 홀로그램 영상을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는 한 소년이 있고, 또 그 소년의 뒤편에 유령처럼 떠다니는 소녀의 형상이 있다.

소년의 신상은 아카식 레코드의 AR-206778#1번 기록 이용자 ###.

소녀의 이름은 해당 기록의 전파와 보전을 맡은 정보수호형 AI, 희망 양이다.

상냥함과 엄격함의 그 사이 어딘가, 표정에 가까운 무표정을 지은 희망 양은 눈을 살짝 감은 채로 작은 입을 연다.



《어떠셨나요?》

???: "어땠냐니, 뭐가?"


소년은 꽤나 퉁명스럽게 받아친다.

기록 열람을 두고 벌어진 내기에서 훌륭한 추리로 승리했음에도 계속해서 방해하는 AI의 존재가 거슬린 모양이다.


《두 번째 살인 말이죠. 첫 번째 기록 제공자의 사체가 저렇게 발견되다니, 오묘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 "글쎄. 잘 모르겠어."

《흐응? 반응이 너무 쌀쌀맞은 거 아닌가요?》

???: "희망 양... 난 아카식에 추리 놀이를 하러 온 게 아니야. 사람이 죽은 건 안타깝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아. 몰입하고 싶지도 않고."

《그럼 쫓아내도 되나요? 무. 단. 침. 입. 자.》

???: "아, 아니! 시험을 통과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AI가 거짓말 같은 걸 해도 돼?!"

《호호. 농담이랍니다, 농담. 뱉은 말이 있으니 당신이 제 유희에 비협조적으로 나온다해도 쫓아내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그래도 당신이 기록을 열람하는 데 약간의 짓궃은 방해 정도는 할 수 있답니다?》

???: "…네 ai의 베이스 모델이 된 사람, 만나본 적은 없어도 분명 정상인은 아닐 것 같네. 좋아. 이번엔 무슨 문젠데?"



자포자기한 소년은 자세를 고쳐앉고 검은 머리칼을 긁적이며 묻는다.

아카식의 AI가 자신을 절대 내쫓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상 시간의 여유는 벌어둔 셈이었다. 소년에게도 잠시 숨 가쁜 살인게임으로부터 한 숨 돌릴 여유는 필요하니까.

그리고 실은, 말은 퉁명스레 했지만 소년의 제일 가는 특기이자 취미가 추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신만만하군요. 마음의 준비가 됐다면 두 번째 문제를 드리죠.》

???: "얼마든지."

《그럼 문제입니다. '어촌에 들어선 후 카라스야마 류이치가 거짓말한 총 횟수를 맞춰보세요'.》

???: "……."

《농담이에요. 후후. 방금 건 무시하세요. 진짜 문제는 따로 있고, 이번만큼은 특별히 틀린다해도 페널티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당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 것 뿐이니까….》



씨익. 희망 양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소년은 괜한 불안감을 느낀다. 패널티가 전혀 없을 거라는 말도, 어쩐지 믿기가 어렵다.

소년은 다짐을 굳힌다.




《자, 그러면 진짜 문제 드리겠습니다.

어촌 살인사건의 검정과 피해자를 나열하세요! 어때요, 간단하죠?》



???: "……정말 대책없이 던지는구나."


소년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론 그 무모한 과제에 어쩔 수 없는 탐정으로서의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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