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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발언자의 신원을 표기하기 위해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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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 ch.2 비일상편
<까마귀가 싸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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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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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가 수집한 증거 목록



<모노사메 파일 #1}
시체 발견 장소는 부둣가, 사인은 목뼈 골절.
유난히 성의없는 내용이다.


<손상된 안면}
시체의 얼굴은 보존상태를 감안하더라도 심하게 훼손되어있다.


<쇠사슬}
시체의 다리에 묶여있던 무거운 쇠사슬.


<인상착의}
시신의 머리카락과 인상착의를 봤을 때 시신의 주인은 분명히….


<드라이아이스 창고}
다량의 드라이아이스와 카트가 구비된 창고.
잠금장치가 고장난 것으로 보아 누군가 다녀간 것 같다.


<이나모리의 증언}
누군가 낚싯배와 조각배를 타고 나간 흔적이 있다.


<떠밀려온 카트}
해안가에 밀려온 카트. 냉동창고에 있는 것과 같은 물건으로 보인다.


<의미 없는 등대?}
굳게 잠겨있는 등대.
아무런 힌트도 찾지 못해 의미를 알기 어려운데….


<연구교실의 쪽지}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서 발견된 쪽지.
'항구에서 봐요…. 당신만큼이나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보여줄게요…. 반드시 혼자…'


<개인실의 쪽지}
인쇄했다고 해도 믿을만큼 바른 글씨로 쓰인 글씨. 그에 비해 그림실력은 형편없다.
'22시까진 돌아올게요.
(\(\     
(  -.- )
O_(")(")     '


<CD 플레이어}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 있던 물건. 구닥다리지만 볼륨은 꽤 큰 편이다. 구비된 CD는 토미하레 소루의 연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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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부 이토리: "피해자는 토끼녀가 아니야.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백날 천날 누굴 붙잡고 떠들어봤자 해답이 나올 리가 없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으로 장내를 충격에 빠뜨린 아자부 이토리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니컬한 표정으로 어딘가의 바닥을 노려다보고 있었다.

불과 방금 전까지 물어뜯으며 싸워대던 무라츠바키와 타키모리도, 학급재판보단 편가르기 놀이를 하며 떠들어대던 병풍들도 모두 단체로 침묵에 빠졌다.

그간 손놓고 방관만 하던 '나'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대체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당신, 그 물 머금은 여성의 시체를 보지 못한 겁니까? 그건 토론의 여지 없이 분명 카미나기 한나였습니다!"

아자부 이토리: "시체? 봤지. 누구보다도 자세하게, 가까운 곳에서.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말이야. 그 시체는 카미나기 한나가 아냐. 절대로."

"…이토리 쨩? 제대로 설명해줄래? 그게 무슨 소리일까? 내 등신같은 파트너가 살아있다니?"

아야키치 슌: "……한나는 등신이 아니야. 카라스야마 류이치. 물론, 그 목이 부러진 시체도 한나가 아니고."

"……."



시체를 발견한 이후 말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벙어리가 되었던 아야키치 슌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마치 코카서스 장수풍뎅이를 생으로 씹어먹은 것처럼 불편해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 눈에는 분명 활활 타오르는 어떤 영혼.

투지가 담겨있었다.



아야키치 슌: "한나는 죽지 않았어. 아니, 적어도 아직까지는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

쓰레기 수거선에서 발견된 그 끔찍한 시체의 진짜 이름은, 초고교급 현악부원, 토미하레 소루야."





-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카미나기 한나가 살아있다. 그리고 물에 푹 불은 채 꼴사납게 내팽겨쳐져있던 그 여고생 시체의 정체는 초고교급 현악부원, 토미하레 소루다…."

아야키치 슌: "……."

아자부 이토리: "……."

"……."

타키모리 유미코: "……."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몇 가지 확인하겠습니다만,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아자부 이토리는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그렇다면 혹시 수 시간 이내에 항정신성 약물이나 폭음을 했습니까?"


이번엔 아야키치 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눈치없는 농담, 때아닌 실언. 그것도 아니라면…."

아자부 이토리: "그만, 현실부정은 거기까지! 못알아듣겠다면 몇번이고 말해줄까. 그 사체의 신원은 '카미나기 한나의 옷을 입은 토미하레 소루', 초고교급 현악부원이며 '남자'야. 이건 농담도 의견도 아닌 팩트. 그러니까 그 이상 왈가왈부하지 밀라고."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

무라츠마키 마사오미: "…설명을. 되도록 이해할 수 있을만한, 납득이 가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예상치도 못한 개막장 전개에 결국 할 말을 잃고 만 변호사 군.

타키모리 유미코를 몰아세울 때의 기세는 촛불 꺼지듯 사라지고, 반쯤 아연실색한 눈치로 진상규명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아자부 이토리: "'벗겨봤다'. 어쩔래."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

타키모리 유미코: "이, 이, 이, 이토리 양, 시체에 대체 무슨 짓을…!"

아자부 이토리: "무슨 짓은 무슨 무슨 짓. 너 자꾸 아가리 놀리지 말라고 경고했지? 바보키치가 갑자기 시체의 성별이 궁금하다는데 달리 방법이 있냐? 나라고해서 그런 소름끼치는 짓 하고싶어서 한 줄 알아?"

아야키치 슌: "아, 하하하…. 죄, 죄송…."

아자부 이토리: "됐고 네가 설명이나 마저 해! 바보들 하나하나 떠먹여주기 싫으니까."

아야키치 슌: "아, 예, 예엡…."



…어쩐지 둘 다 말수가 없고 서로 쳐다보질 않는다 했더니, 그런 이유였던 건가.

단짝친구가 죽은 것치곤 어째 너무 덤덤한 것 같다고 느껴지던 아야키치 슌의 태도도 시체가 카미나기가 아니라면 모두 설명된다.

'나'는 마치 화면 밖 방청객이 된 기분으로 아야키치 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야키치 슌: "…처음 위화감을 느낀 건 카라스야마가 모노사메에게 던진 질문 때문이었어."

"응? 내가?"

아야키치 슌: "그래, 설마 금세 잊은 건 아니겠지? 분명 너도 뭔가 알아챘기 때문에 던진 날카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대로 사람을 지능캐 취급하지 말란 말이다.



아야키치 슌: "뭐, 그런 게 아니라면 됐어. 기억이 안 난다면 기억나게 해주면 되니까.

한나로 추정되는 시체가 처음 발견되고 모노사메가 나타났을 때, 카라스야마는 이렇게 물었지. '질문이라기보단 확인 같은 건데. 카미나기는 살해당했으니 지금 당장 피에로 녀석들에게 목이 따이는 건가?' 라고.

그리고 그에 대한 모노사메의 대답은 이랬어.

<피해자 살해식은 검정 처형식과 동시에 진행하겠음!>

더 물고 늘어지지 말라는 식의 반 협박성 멘트도 덧붙여서."


"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저 자식은 뭔데 남의 대화를 단어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걸까.

카미나기와 비견되는 기억력이라는 건 알고있었어도 이런 식으로 체험하게 되니 어째 속이 메스꺼웠다.



아야키치 슌: "모노사메는 어째선지 대답에서 '카미나기 한나'라는 이름만은 쏙 빼놓았어. 죽은 피해자를 당장은 살해하지 않겠다는 것도 그렇고, 굳이 현실세계의 피에로들에게 허락을 구하고 오는 것까지도 뭔가 어색했지. 마치 사전에 생각해두지 못한 상황을 맞닥들인 것처럼 느껴졌달까.

두 번째 위화감 포인트는 모노사메 파일. 모노쿠마 파일과 비교해봤을때, 그 퀄리티가 너무나도 조악하고 실속이 없었어. 모노쿠마 파일도 그렇게 정보가 풍부한 편은 아니었는데도 말이야."


-


피해자는 시무라 카리나.
시체 발견 현장은 카지노 건물 2층의 공연 홀.
사망 추정 시각은 21:30분 무렵.
후두부를 둔기로 가격당한 외상 존재, 직접적인 사인으로 보이는 것은 심장을 찌른 흉부의 깊은 자상(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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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키치 슌: "이게 지난번 살인사건, 모노쿠마 파일의 내용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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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발견 현장은 부둣가의 쓰레기 수거선.
보존 상태가 나빠 사망 추정 시각은 파악할 수 없음.
몸싸움의 흔적 존재.
사인은 밧줄 같은 물건으로 목을 졸려 교살, 목뼈가 부러져 사망한 것으로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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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키치 슌: "이게 이번 시체에 괸한 모노사메 파일의 내용이야. 바보가 아니라면 어떤 점이 어색한지 알겠지."


키쇼: "음… 바보라서 유심히 생각해야 아는 검다…. 음… 음아아앗! 없슴다! 모노사메 파일에는… 사망 추정 시각과…. '피해자의 이름'이 없슴다!"


아야키치 슌: "바로 그거야. 사망 추정 시각이야 사체의 상태 때문이라곤 해도, 피해자의 간단한 신상정보마저 기재되지 않은 건 분명히 어색해.

거기다가 모노사메가 모노사메 파일을 두고 가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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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사메 파일은 기본적으로는 제군들의 조사를 돕기 위해 제작되지만 형평성을 위해 검정의 의도를 반영하여 내용이 첨삭될 수 있다는 점 이해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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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라토 유즈: "'검정의 의도를 반영하여 내용이 첨삭될 수 있다'라…. 그 말은 이번 사건의 검정이 의도적으로 피해자의 신상을 숨겼다는 거겠네."

아야키치 슌: "이쯤되니 수상한 냄새를 지울 수가 없었어.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추리라, 한나가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바보같은 짓을 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한 번 의심이 들고나니, 시체의 체형마저도 어딘가 어색하게 보였지. 그래서… 염치를 무릅쓰고 이토리 씨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어."

아자부 이토리: "참내. 어련하셨겠어."

아아키치 슌: "윽."

아자부 이토리: "나도 바보키치의 부탁을 받고 시체를 다시 조사했을 땐 이게 시발 뭔 엿같은 경우인가 싶었지만… 학급재판이 시작하고서도 그 활쟁이 놈이 나타나지 않는 걸 보고 알았지. 이 시체는 카미나기 한나의 옷을 입혀진 토미하레 소루라는 걸."

무라츠바키 타케오미: "그렇다면… 정말로 그 시체는…."

타키모리 유미코: "세상에…!"

타노 나타타: "아하하핫! 개 또라이 아냐?! 시체에 굳이 여장까지 시켜? 진짜 싫다~ 꺄하하핫!"

아야키치 슌: "…범인이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논의가 아직 필요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타키모리 유미코: "지금까지 내가 억울하게 범인취급을 받고 있었다는 거겠지! 안 그래, 무라츠바키 군?"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

타키모리 유미코: "뭐어? 피해자인 한나 양이랑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 10분 안에 자백하게 만들겠다고? 이 멍청이, 말미잘, 해삼! 그러게 내가 한나 양의 행적은 모른다고 했어, 안 했어?! 게다가 죽은 건 내… 내 파트너잖아! 한나 양이 아니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윽…."



울먹임 탓에 붉게 부어오른 눈시울을 닦으며 반격에 나선 타키모리 유미코에게 초고교급 변호사 무라츠바키 마사오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자신만만하게 몰아붙일 땐 언제고 금세 꼬리를 내리는 꼴이라니.

초고교급 변호사는 맞지만 검사의 재능은 없는건가.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달리 드릴 말씀이 없군요. 이건 제 완전한 불찰입니다. 피해자가 뒤바뀌었을 거라곤 도무지 상상도… 어찌 사과를 드려야할지…."

타키모리 유미코: "입닥쳐!"

"오오."

타키모리 유미코: "너, 아니, 무라츠바키 군, 내가 지금 가장 굴욕적이고 화나는 게 뭔지 알아? 순간이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야, 토미 군이 죽은 걸!"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

타키모리 유미코: "그 시체가 한나 양이 아니라 토미하레 소루라는 걸 들었을 때… 난 안도해버렸어! 누군가 죽은 건 변함없는데도, 심지어 그게 내가 지키고 보듬어줬어야 할 파트너인데도 난 다행이라고 생각해버렸어! 내가 의심받지 않을 테니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죽은 토미 군도 죽었을지 살았을지도 모르는 한나 양도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지워버렸어! 그게 너무 역겹고 밉고 쪽팔린다고! 알아들어?"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쯧. 그저 살았으면 된 것을."

타키모리 유미코: "뭐…?"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추리가 빗나간 건 저 개인으로서도 학급재판의 참여자로서도 안타깝게 됐습니다만, 타키모리 씨의 혐의가 벗겨진 것만큼은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이겠지요. 새로운 정보를 바탕으로 다시 범인을 수색하면 될 일입니다."

타키모리 유미코: "뻐, 뻔뻔하긴! 계속 그딴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유키야마 카무이: "…주황머리 여자. 그만. 거기까지."

타키모리 유미코: "…?"

유키야마 카무이: "…지금은 학급재판 시간.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개인적인 감정을 내세울 때는 아닌 것 같다. 내 말이 틀린가?"

타키모리 유미코: "……."



바보 그룹의 수장에게 일침을 얻어맞은 게 꽤나 아니꼬왔는지 타키모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입꾹꾹이를 했다.

하지만 바보의 말이라도 맞는 말은 맞는 말.

지금은 자존심이 어쩌니 양심이 어쩌니 떠들고있을 때가 아니다.

믿고있던 초고교급 변호사가 허당이란걸 알아버린 이상, 슬슬 이 몸도 직접 재판에 참여할 준비를 해야겠지.

무엇보다도 흰토끼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정말로….

다행인가?



타키모리 유미코: "…그 시체가 토미하레 군이란 건 잘 알았어. 그래서, 새로 범인을 잡아낼 단서는 있는 거야? 이토리 양? 아야키치 군?"

아자부 이토리: "……."

아야키치 슌: "……."

타키모리 유미코: "그 표정은 뭐야? 뭔가 짚이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이야길 해 줄래? 그렇게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뚱하니 있지만 말고?"

아리스 윈터우즈: "저기, 두 분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맡은 일을 다 하셨다고 생각해요. 그 끔찍한 시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조차도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이토리 양은 직접 만지기조차 했으니까요…. 분명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저흰 아직도 유미코 양을 몰아세우고 있었을 거에요."

타키모리 유미코: "두 사람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래도 결국 범인이 누군지 전혀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 건 여전하잖아. 정말 아무도 없어? 짚이는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주저 말고 이야길…."

이나모리 쿠키: "…범인, 내가 알 것 같은데."

타키모리 유미코: "어?"

이시미네 칸: "…하아? 잠탱이, 당신이 범인을 안다고요?"



타키모리의 닥달에 응답한 건 의외의 인물, 이나모리 쿠키였다.

초고교급 랭킹메이커, 극도의 보신주의자.

몸이나 사리다가 단서나 뿌릴 줄 알지 절대로 직접 뭔가 하려고 들진 않는 녀석이 웬일로 범인을 잡겠다고 나선 걸까?



이나모리 쿠키: "흐아암…. 그래, 간단한 퀴즈잖아. 바보들, 겨우 이 정도도 생각 못하다니. 모노쿠마가 지옥에서 울겠다.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보디가드 온냐랑 도박사 할배가 뭔가 알고있으면서 저렇게 아무 말 못하고 있는 이유도 뻔한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살아있다. 그리고 범인으로 의심받던 사람이 사실은 여장당한 시체의 주인이었다….

이런 짓을 벌여서 '이득'을 볼 사람이 딱 한 명 밖에 더 있겠어?"




……?

잠깐만.



이나모리 쿠키: "그동안 용의선상에서 깔끔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사람. 학급재판에 참여조차 하지 않고서 모두를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던 사람. 카미나기 한나의 옷을 누구보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고, 마지막 목격증언 이후로 알리바이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사람."



잠깐만, 잠깐만요. 저기요. 선생님.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시미네 칸: "…설마."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오호라…."

"…어이, 꼬맹이! 기다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최악이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흐름이다!



이나모리 쿠키: "기다리긴 뭘 기다려. 똑똑히 들려주지.

이번 사건의 범인은, 죽은 사람 행세를 하며 우리들을 기만한 '카미나기 한나'밖에 없다구. 물론 그 파트너이자 공범인 네놈까지 말야, 애송이."




카미나기 한나, 너 설마….

'죽임당한 쪽'이 아니라, '죽인 쪽'이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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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래? 발달장애 꼬맹이. 고작 침낭에 장난 좀 쳤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기야? 응?"

이나모리 쿠키: "흥. 뻔뻔하게 친한 척 하지 마셈. 살인자."


갑작스레 범인으로 지목당한 당혹감을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나'의 어설픔에는 헛웃음이 다 나왔다.

젠장.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치 못했을까.

시체가 카미나기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예감했어야 하는 건데.

어째서 안심했던 걸까.

어째서 아, 내 파트너가 살아있구나, 하고 소소하게나마 기뻐해버린 걸까.

그 파트너가 날 지옥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갈 붉은 실로 이어져있는데도, 어째서 좀 더 경계하고 단속하지 않은 걸까.



천공호텔 단간론파의 가장 큰 특징. <태그 시스템>.

남녀가 한 쌍으로 이루어진 알파벳 태그들은 한 방에서 함께 생활하며, 학급재판의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함께 진다.

그말인즉슨 살인을 저지른 검정의 파트너는 학급재판에서 승리할 시 검정과 함께 호텔을 체크아웃 할 수 있고, 반대로 패배시엔 함께 '벌칙'을 받는다.

언뜻 보면 합리적이고 새롭게만 보이는 이 시스템에는 사실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바로 그 자신이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파트너에게 가해지는 책임은 똑같다는 것.

최악의 겅우엔 가만히 손가락 빨고있던 선량한 시민도 다짜고짜 살인을 저지른 파트너 때문에 처형당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나'는 선량한 시민도 아니고, 파트너가 피에 미친 싸이코 살인광도 아니지만,

그 최악의 경우가 일어난 것만 같다는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흰토끼가, 그 카미나기가 살인 같은 걸 저질렀을 리는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판단한단 말인가? 언제부터 안 사이라고?

…아냐.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야만 한다. 어떻게든.

카미나기가 범인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치 않아.

살아남는다. 최악의 경우엔 혼자 남게 되더라도, 살아남는다.



"하. 이나모리 쿠키와 안경거치대. 너희가 초고교급 중에서 손꼽히는 빡대가리인건 알고있었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한걸?"

이나모리 쿠키: "니미요."

이시미네 칸: "잠깐만요, 저는 왜 잠탱이랑 같이 욕먹는 겁니까?!"

"못난 파트너를 둔 죄지. 이봐. 시체의 옷을 갈아입혀서 이득 볼 사람이 카미나기라고?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나모리 쿠키: "방금 전까지 그 단순한 트릭을 못 풀어서 사람 하나 골로 보낼 뻔 한 건 알랑가몰라. 가끔은 단순한 게 잘 먹히는 법이지. 물에 빠진 시체의 옷을 벗길 거라곤 생각지 못한 게 아니겠어?"

"카미나기 한나는 바보가 아냐. 작정하고 살인을 저지른다면 그 트릭은 겨우 잠깐 머릴 싸매는 정도로는 안 끝난다고."

이나모리 쿠키: "아무리 똑똑해도 살인의 프로는 아니니까. 추리 소설이라도 즐겨 읽지 않았다면 솜씨가 어설퍼도 이상할 건 없잖아?"

"피해자는 아무리 이쁘장해 보여도 '남자'야. 평범한 여자애인 카미나기가 혼자서 제압할 수 있었겠어? 시신에서 약물은 검출되지 않은 걸로 알고있는데?"

이나모리 쿠키: "옷을 갈아입힌 것 정도로 여자와 구별을 못할 만큼 마른 체형이라면 성별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나라도 그런 허수아비는 때려눕히겠다. 게다가… 카미나기 할망구에겐 급할 때 써먹을 수 있는 '공범'이 있잖아?"

"공범이 날 말하는 거라면 헛다리 제대로 짚었어. 실종된 카미나기를 처음 찾아나선 게 나라고. 공범이라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잖아?"

이나모리 쿠키: "푸흡. 바보. 공범이니까 파트너가 실종된 걸 여기저기 돌아다이면서 알렸겠지. 그래서 알리바이도 만들고, 새벽 시간에 딱 맞춰서 시체도 발견하고. 일석이조구만유?"

"……!"



아뿔싸. 말려들었다.



이나모리 쿠키: "패배를 인정하고 죄를 뉘우치며 죽어라, 닝겐. 피쓰."

"꺼져. 증거가 없잖아. 카미나기와 토미하레 소루 사이의 연결고리를 제시해보시지. 누가 이득을 보나 마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된 증거를 내밀어보라고."

이나모리 쿠키: "흐응. '증거 있어?'라는 말, 범인들이 자주 하는 단골 멘트라는 건 알고있어?"

"논리가 없잖아!"

후네즈 신지: "흐흥~ 위기에 빠진 류 쨩도 귀엽네♤"

"입닥쳐, 신지. 구경만 하지 말고 좀 돕는가."

후네즈 신지: "내가 왜? 나도 류 쨩이랑 흰토끼 쨩이 범인 같은데♤"

"이 의리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새끼…."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그럼… 이쯤에서 저도 이나모리 씨에게 가세하지요."

"!"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타키모리 씨를 밀어붙인 게 너무 죄송해서 말입니다. 이번엔 제대로 일 좀 해야겠군요."



이 꼴통 변호사 새끼가 또 헛소리를 하려고…! 타키모리한테 미안한 걸 왜 이쪽에다 풀려는 거냐!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카라스야마 씨,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셨는데, 합당한 증거가 제시되었을 때의 결과를 책임질 각오는 되었습니까?"

"아니. 각오 안 된 것 같은데. 일단 진정하고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천천히 대화하는게…."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됐습니다. 이미 충분한 증거가 모였기 때문에. 당신의 파트너 카미나기 한나가 타키모리 유미코 씨의 상담실을 떠난 이후의 행적, 왠지 알 것도 같습니다."

"…뭐?"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그 때 카미나기 한나와 타키모리 씨의 상담은 평소보다 유난히 일찍 끝났죠…. 타키모리 씨의 증언에 의하면, 상담을 일찍 끝낸 건 '카미나기 한나가 몸이 좋지 않다고 호소해서…' 였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타키모리 유미코: "응… 맞아. 확실하게 기억해. 그, 평범한 여자들보다 통증이 심한 편이라고 하더라고."

이시미네 칸: "통증이요? 무슨 뜻이죠?"

타키모리 유미코: "대충 알아들어, 이 안경찐따야."

이시미네 칸: "……아."

타키모리 유미코: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곤… 그렇게 아파보이진 않았단 말이지. 안색이 엄청 안좋긴 했지만 뭐랄까
…. 물론 한나 양의 NG 행동이 있으니까 거짓말은 못 하겠지만."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거짓말은 못 하지만 그게 남을 속일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미 한 번 겪어봤듯이요."

"…."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이를테면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 하면 안될까요? 제가 남들보다 통증이 심한 편이라….' 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치 컨디션 난조 문제가 있는 듯 연기할 수 있었겠죠. 어떻습니까, 타키모리 씨? 카미나기 씨와의 정확한 대화가 기억나시는지?"

타키모리 유미코: "으, 으음….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바보같은 대화는 그만두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카미나기 한나는 상담을 일찍 끝내고 타키모리 씨의 연구교실을 빠져나왔습니다. 자, 이제 자유시간이군요. 그렇다면 그녀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었을까요?"

"몰라, 병신아. 그 뒤로는 목격자가 없다는 걸 잊었냐?"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목격자는 없지만… 정황상 추정은 가능합니다. 카라스야마 류이치. 당신이 가지고 있지요? …그 '쪽지' 말입니다."

"…!"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서 찾아낸 쪽지… 모두들 볼 수 있게 훤히 보여보시죠. 시치미 뗄 생각은 마십시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스토커냐?"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스토킹은 저에게 당신이 했지요. 자, 시간끌지 말고 어서."



…젠장.

'나'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주머니 속에 꾸깃꾸깃하게 접어둔 쪽지를 펼쳐보였다.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서 발견한 쪽지. 내용은 간단하고, 어이가 없을만큼 아주 수상하다.

'항구에서 봐요…. 당신만큼이나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보여줄게요…. 반드시 혼자…'



"…무슨 근거로 이 쪽질 카미나기가 남겼다고 주장하는 거야? 어이가 없군."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시간대의 대조입니다, 카라스야마 씨."

"하?"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카미나기 씨가 상담실을 떠난 시간, 즉 아직 연구교실 플로어에 머물고 있던 시간대와 초고교급 현악부원 토미하레 소루가 매일 연주를 시작하는 시간… 오묘하게 교차된단 말입니다."


무라츠바키는 천천히 부채를 부치며 한마디 한마디 언어의 날을 갈기 시작했다.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알고 계셨을지 모르겠지만, 토미하레 씨는 매일 밤 22시마다 연구교실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아예 숙식도 그곳에서 해결하는 것 같더군요. 식사하러 나오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한편 카미나기 한나의 상담 예정 시간 20시 30분…. 상담실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으니 21시에서 21시 30분 쯤엔 카미나기 씨는 자유의 몸이 되었겠죠. 이때 카미나기 씨는 문제의 쪽지를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의 문틈으로 찔러넣은 겁니다.

연주를 시작하는 22시가 되기 이전, 토미하레 씨는 그 쪽지를 발견하고, 범인의 간계대로 부둣가에 제발로 걸어간 거죠. 그래서 그날 밤엔 늘 연구교실 층에 울려퍼지던 연주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은 겁니다."

"억지 부리긴. 피해자는 저능아냐? 그딴 쪽지를 믿고 홀라당 넘어가게?"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실제로 토미하레 씨는 지능이 다소 낮은 편이죠. 안타깝게도, 그게 현실입니다."

"거 쓰레기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네…!"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그리고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범인이 굳이 대화 대신 쪽지라는 수단을 고른 것도 카미나기 한나를 지목합니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카미나기 한나, 그녀가 피해자를 속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수단이 바로 필담인 겁니다. 거짓말을 적은 쪽지 정도라면 NG 행동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겠죠."

"……후. 한 가지 확실히 해두겠는데, 그 쪽지는 절대로 카미나기가 적은 게 아니야."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

"대조 샘플이 있으니까. 이건 카미나기가 개인실에 남겨둔 쪽지야. 글씨체를 잘 보시지."


-


<개인실의 쪽지}
인쇄했다고 해도 믿을만큼 바른 글씨로 쓰인 쪽지. 그에 비해 그림실력은 형편없다.
'22시까진 돌아올게요.
(\(\     
(  -.- )
O_(")(")     '


-



"보다시피 카미나기의 글씨는 기계로 찍어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완벽한 정자야. 그에 비해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서 발견된 쪽지는 그럭저럭 잘 쓴 수준이지. 이래도 카미나기가 쪽지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어?"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호오…. 나름 괜찮은 반격이었습니다만, 그래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뭐?"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글씨체의 차이 따위야 일부러 못 적으면 되는 문제니까요. 카미나기 한나는 두 쪽지가 발견될 것을 미리 염두해 두고 일부러 글씨를 다르게 적어낸 겁니다. 이해가십니까?

두 글씨가 같다면 그건 동일인물임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가 되지만, 반대로 두 글씨가 다소 다르다고 해서 그게 무죄를 입증해주진 못합니다. 안티깝군요, 카라스야마 씨. 나름 호두만한 두뇌를 쥐어짜낸 회심의 반격이었을텐데."

"……."


이런 시발. 아니라고 말도 못하겠네. 나름대로 활로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결국 피해자와 범인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충분히 입증된 것 같군요. 카미나기 한나의 옷을 입고 죽은 피해자, 피해자의 연구교실에 쪽지를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카미나기 한나. 범행을 저지른 타이밍을 생각해볼때, 어쩌면 카미나기 한나는 타키모리 씨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녀의 잔꾀에 속아넘어갈 뻔 했으니."

타키모리 유미코: "속아넘어갈 뻔이 아니라 완전히 넘어갔잖아…!"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뭐, 살해방식 자체엔 불가사의한 트릭 같은 건 없어보이니 굳이 해명할 필욘 없어보입니다. 더 떠들 말이 남아있습니까? 유언이라면 들어주지요. 카라스야마 류이치."

"……."




젠장.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냐. 어쩌다가.

이거 빼박이잖아. 흰토끼가 범인인지 아닌지는 중요치도 않다. 문제는 고작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한 '나'에겐 진실을 밝힐만한 촛불만큼의 힘도, 초고교급 변호사를 속여넘길만큼 대단한 꾀도 없다는 거다.

멧돼지가 피해자로, 하루히가 범인으로 처형당한지 얼마나 됐다고 '나'까지 이 꼴이 되어버린 거냐?

…….

이대로라면 그 둘의 복수는커녕, 직접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때문에 꼴사납게 목매달리게 생겼네.

그런 건 절대로, 절대로 용납할 수 없지.

흑막의 목을 따기 전까진 절대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런 게 어디있단 말인가.

일반인에 불과한, 일개 '시청자 대표'인 '나'에게 초고교급 학생들에게 대항할 만한 무기 따윈….

무기 따윈….

따위… 는….



…….







"……도와주라."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 무슨…."



"도와줘. 어이. 안 들리냐? 도와달라고."



이나모리 쿠키: "…????"

이시미네 칸: "뭐야…. 왜 저러는 거죠?"



"계속 그렇게 멍하니 있지만 말고, 좀 도와달란 말이다. 이 개자식아. 이대로 다 죽일 셈이냐…?"



시가라토 유즈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저건? …후네즈 신지?"

후네즈 신지: "아니…. 아무래도 나는 아닌 것 같네♤. 흐음. 위기에 처한 류 쨩이 지금 상황에서 부를만한 건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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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네즈 신지: "…'공식 지능 스탯 1위',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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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노 님, 실험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제발 나 좀 살려주세요!"

타노 나타타: "어머, 나 불렀닝? 아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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