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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발언자의 신원을 표기하기 위해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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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 ch.2 비일상편
<까마귀가 싸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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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주황은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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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가 수집한 증거 목록



<모노사메 파일 #1}
시체 발견 장소는 부둣가, 사인은 목뼈 골절.
유난히 성의없는 내용이다.


<손상된 안면}
시체의 얼굴은 보존상태를 감안하더라도 심하게 훼손되어있다.


<쇠사슬}
시체의 다리에 묶여있던 무거운 쇠사슬.


<인상착의}
시신의 머리카락과 인상착의를 봤을 때 시신의 주인은 분명히….


<드라이아이스 창고}
다량의 드라이아이스와 카트가 구비된 창고.
잠금장치가 고장난 것으로 보아 누군가 다녀간 것 같다.


<이나모리의 증언}
누군가 낚싯배와 조각배를 타고 나간 흔적이 있다.


<떠밀려온 카트}
해안가에 밀려온 카트. 냉동창고에 있는 것과 같은 물건으로 보인다.


<의미 없는 등대?}
굳게 잠겨있는 등대.
아무런 힌트도 찾지 못해 의미를 알기 어려운데….


<연구교실의 쪽지}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서 발견된 쪽지.
'항구에서 봐요…. 당신만큼이나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보여줄게요…. 반드시 혼자…'


<개인실의 쪽지}
인쇄했다고 해도 믿을만큼 바른 글씨로 쓰인 글씨. 그에 비해 그림실력은 형편없다.
'22시까진 돌아올게요.
(\(\     
(  -.- )
O_(")(")     '


<CD 플레이어}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 있던 물건. 구닥다리지만 볼륨은 꽤 큰 편이다. 구비된 CD는 토미하레 소루의 연주집.



-



아야키치 슌: "이제 허수아비는 그만 세우고, 직접 나와서 상대하지 그래?

이번 사건의 검정이자, '또 한 명의 피해자'인….

타키모리 유미코! 당장 대답해, 한나는 어디에 있어!"




타키모리 유미코: "……."


타키모리 유미코: "…하아. 짜증나."



-




오리무중을 떠돌던 학급재판은 절정으로 치닫지만,

모노쿠마 호텔을 감싸던 안개는 더욱 짙어져만 갔다.



-





아리스 윈터우즈: "유… 유미코 양이…?"

이시미네 칸: "…타키모리 유미코 씨가 범인이라고요? 짜증나는 사람이긴 해도, 그래도…."

쇼코라 치에: "거, 거짓말…. 이번에도 착각이겠지. 노름꾼 오빠야가 뭔가 착각한 걸 거야. 언니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 천사같던 유미코 언니라고…?"

유키야마 카무이: "…진정해라, 꼬맹이. 아직 결론이 나온 게 아니다."

타노 나타타: "하아~? 뭐 하는 짓이야, 자기. 김 빠지게. 흥. 타노 삐졌어. 이제 아무 말도 안할래."



아야키치 슌이 범인으로 지목한 초고교급 상담부원인 타키모리 유미코였다.

한 번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가 살아난 그녀여서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평소에 보여온 행실과 인망이 훌륭해서였을까.

아야키치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고, 웅성임과 안개 속에서 타키모리 유미코는 가만히 고개를 떨군 채 앞머리에 시선을 숨겼다.

짜증난다, 는 외마디 말만 남긴 채.



아야키치 슌: "…세 번은 묻지 않을테니 잘 대답해. 한나, 지금 어디있어?"


타키모리 유미코: "……짜증나네 진짜…."


아야키치 슌: "대답하라고…! 한나를 어디에 숨겼느냔 말야! 그 애는… 네가 건드린 그 애는 내 둘도 없는 친구라고! 내겐 피로 이어진 가족만큼 소중한 사람이란 말야!"


타키모리 유미코: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아야키치 슌: "뭐…?"



차갑게 맞받아친 타키모리는 흥, 코웃음을 치더니 주머니를 뒤젹여 손바닥 크기만한 무언가를 꺼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화장품과 거울이었다.



아야키치 슌: "지금 장난해?!"

타키모리 유미코: "예쁘게 보여야 할 거 아냐? 지금 한창 내 얼굴만 잡히고 있을텐데. 안개랑 습기 때문에 화장이 다 퍼졌어. 엉망이야. 맘에 안 들게."

아야키치 슌: "……."

타키모리 유미코: "한창 겉모습에 신경 쓸 나이잖아? 이해 좀 하지?"

아야키치 슌: "…정신이 나간 거지? 이런 상황에서 화장 신경쓰는 정신병자가 어디있어?"

타키모리 유미코: "아아잇, 하여간. 슌 군, 여자 못 만나 본 티가 나! 공감능력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니까?"

아야키치 슌: "이런 미친…!"



기가 막힐만큼 뻔뻔하고 도도한 말투.

분명히 당차고 자존감 높은 타키모리 유미코의 일면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는 모습이겠지만 그건 분명 지금까지의 그녀와는 결이 다른 언행이었다.

마치 눈앞의 상대에 대해서는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듯한 철저한 안하무인의 기세.

인간의 마음을 읽고 위로하는 초고교급 상담부원의 모습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웠다.

정말로… 저게 우리가 알던 타키모리 유미코의 실체인가?



타키모리 유미코: "어떻게 알았어?"


아야키치 슌: "!"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타키모리 씨…!"


타키모리 유미코: "뭐야? 왜 놀래? …아, 너무 쉽게 인정해서 그렇구나. 뭐, 피차 쿨 한 게 좋잖아? 어차피 대충 뉘앙스를 보니 눈치는 다 챈 것 같고. 일일히 부정해가면서 추하게 질질 끌고 싶진 않아."


아야키치 슌: "……."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어째서… 어째서 고작 그런 이유로 포기하는 겁니까! 저는 아직 얼마든지 더 싸울 수 있었단 말입니다!"


타키모리 유미코: "타케 군, 닥쳐."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뭣…."


타키모리 유미코: "무라 군이 타노 양에게 형편없이 져버린 덕분에 이렇게 된 거잖아. 초고교급 변호사라더니 고작 고등학생 몇 명도 상대 못하고. 그래가지고서 쓰겠니? 회초리라도 좀 맞아야겠어."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당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타키모리 유미코: "아, 기껏 공들여서 '내 것'으로 만들어놨더니 꽝이었잖아. 짜증나 진짜. 매번 이렇게 나만 운 없지."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당신의 '것'…?!"


타키모리 유미코: "수고했어, 무라 군. 이제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지금부턴 알아서 할 테니까. 편히 쉬렴, 무능한 아이야."


아야키치 슌: "제기랄,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대체! 너 정말 타키모리 유미코 맞아? 약이라도 한 거 아냐? 아무리 봐도 제정신은 아냐, 너…!"


타키모리 유미코: "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 슌 군? 내가 검정인건 어떻게 알았냐니까?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래. 도무지 내 지능으론 그 결론이 도출되는 게 이해가 안되거든."


아야키치 슌: "먼저 질문을 한 건 이쪽이야…! 내 질문에나 대답하고 말을…."


타키모리 유미코: "죽였어."


아야키치 슌: "……뭐?"



…….

…….


"……뭐라고?"



아야키치 슌: "뭐… 지… 금 뭐라… 고…?"


타키모리 유미코: "아, 진짜 짜증나게. 궁금하대서 알려줬더니 이번엔 현실 부정이야? 지랄 요절을 하고있네. 당신 같은 환자가 제일 싫어."


아야키치 슌: "그… 그그그…. 그럴리가…. 없어…."


타키모리 유미코: "죽였다니까 그러네. 정신 차려요, 오빠. 당신 친구는 이미 한참 전에 토막나서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았어. 그야 범인 입장에서 후환을 남겨둘 이유가 없잖아? 슌 군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라면 알텐데. 사실 알면서 물어본 거지? 그야말로 루저의 현실 부정이네. 한심해."


아야키치 슌: "그런… 그런…. 그런 있을 수 없는…."


타키모리 유미코: "있을 수 있어.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머리, 팔꿈치, 어깨, 가슴, 배, 허벅지와 무릎 아래로 조각조각 내서 버렸다고. 꽤 시간이 걸렸지만 그렇게 어렵진 않았어. 살이 정말 연하더라, 한나 양. 덕분에 수고 좀 덜었지."


아야키치 슌: "거짓말이야…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타키모리 유미코: "이젠 슬슬 진부하지 않아, 그런 반응? 그럼 이제 대답해줄 차롄데. 진상을 어떻게 알았냐구. 입 닳겠어!"


아야키치 슌: "…… ……."



결정타였다.

마치 납 화살에 심장을 관통당한 사람처럼, 아야키치 슌의 얼굴은 끔찍하게 일그러지고 빛을 잃었고, 보이지 않는 화살촉을 중심으로 점차 쪼그라들어 굳어버렸다.

패배였다. 그의 완벽한.

고작 몇 문장의 대화조차 성립하지 않는 일방적인 린치였다.

카미나기 한나라는 급소.

그곳을 가볍게 공략당한 이상 아야키치 슌에게 더이상 희망은 없었다.

절망에 빠진 소년은 상담사 소녀에게 언어의 무게를 강탈당했다.



아야키치 슌: "…… ……."


"…이봐? 이봐? 아야키치 슌? 어이! 이봐, 흰토끼 친구! 정신차리라고!"


타키모리 유미코: "…설마 겨우 그 정도로 고장난 거야? 와, 가족만큼 소중한 친구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나보네. 아아, 로맨틱하다! 카지노 딜러와 도박사. 두 개의 육신으로 나뉘어진 하나의 영혼. 서로 죽을만큼 의지하면서도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 이성친구. 부럽다. …아마도 나 같은 건 평생 알 수 없는 감각일거야. 내게 남자는 써먹고 버릴 장기말로밖엔 보이지 않으니까."


아자부 이토리: "바보키치, 바보키치 정신차려! 왜 그러는 거야! 말좀 해봐! 정신 차리라고!"

아자부 이토리: "바보키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당근녀! 지금 당장에 죽고 싶어?!"


타키모리 유미코: "응? 아, 그래. 네가 있었지. 귀여운 이토리 양. 파트너를 걱정하는구나? 귀여워. 혹시 짝사랑?"


아자부 이토리: "'의뢰인'이다! 헛소리나 할 거라면 그냥 죽어!"


타키모리 유미코: "당차서 좋네. 음, 그러면 이토리 양이 심약한 파트너 대신 고생해줘야겠다! 이토리 양은 알아? 슌 군이 어떻게 진실을 파악한 건지?"


아자부 이토리: "정말 이 와중에 그딴 게 궁금하단 말야…?!"


타키모리 유미코: "꼭 내 바램이 아니더라도 학급재판이라면 설명은 필요하잖아? 자백했다곤 해도 다른 아이들이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 표는 받기 어려울 걸."


아자부 이토리: "…이런 미친년이…."



울그락불그락하는 꼴이 선명하게 보이는 게 폭발하기 일보직전 같았지만 어떻게든 참아내려 노력하는 이토리 짱이었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다. 어차피 밝혀야 할 진실이었다. 그 전까지의 과정과 진범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

더군다나 이토리 짱이라면 아마 어떻게든 파트너인 아야키치 슌이 도달한 진실에 닿을 수 있을 테고.

타노가 입을 닫고 아야키치와 무라츠바키가 넋을 놓아버린 이상, 진상을 설명해줄 건 그녀밖에 없었다.



아자부 이토리: "범인이 네년이라는 건 토끼녀의 무죄가 입증된 순간부터 당연한 추론이야. 토끼녀의 마지막 목격자이자 목격 시점부터 이후 수 시간 동안의 행방이 묘연하고, 두 명의 피해자에게 접근하기 가장 용이한 입장이었을테니까.

다만 그 전까지 널 범인으로 지목하지 못한 건 '호텔 쪽에서 타키모리 유미코가 걸어오는 걸 봤다'라는 변호사 놈의 증언과 '설마 자기 파트너를 죽였을까'라는 사소한 의문 때문이었어. 바보키치와 내가 시간이 걸린 것도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제대로 된 단서 하나 없는 마당에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나오긴 어려웠지만… '어째서 카미나기 한나가 아니었으면 안됐던 걸까', '어째서 두 명이나 되는 희생양을 만든 걸까'에 초점을 맞추니 새로운 발상이 떠오르더라고.

타키모리 유미코, 네가 토끼녀를 노린 진짜 이유는… '입막음' 때문이지?"


"입막음이라니, 대체 뭘?"

타키모리 유미코: "…시작이 좋네. 계속해."


아자부 이토리: "…추리의 출발점은 토미하레 소루의 시체였어. 목이 부러지고 심하게 훼손된 시체. 수상한 점이 적잖았지만,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의문을 품은 건 범인이 시체를 물에 빠뜨린 이유였어.

시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하기 위해라곤 해도, 그건 결국엔 들통나게 되어있는 1차원적인 트릭이야.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망 시간의 교란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하지만 범인이 피해자의 사망 시간을 교란해야할 이유가 재판 내내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더군. 어차피 두 사람 다 밤새도록 실종이었던데다 저녁에서 밤 시간대에 범행이 일어났을 게 뻔한 상황이었으니."


타키모리 유미코: "만약 저녁보다 수 시간 이른 낮 시간대에 범행이 일어났고 범인이 그걸 숨기고 싶어했다면? 낮 시간대에 알리바이가 확실하지 않은 범인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잖아?"


아자부 이토리: "귓구멍 막혔냐? 네가 범인이라는 건 진작에 상정해두고 추리했다니까? 낮 시간대에 누구보다 알리바이가 뚜렷한 년이 그런 목적이었을 리가 없잖아?"


타키모리 유미코: "……순 억지네.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좀 더 반항해볼 걸 그랬을까?"


아자부 이토리: "어차피 네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마찬가지야. 낮 시간대에 죽여놓은 시신을 다음날 새벽에 발견시킬만큼 여유가 있다면 애초에 알리바이의 의미가 없거든. 정확하게 한 시간 한 분 한 초까지 쪼갤만큼 모노사메 파일도 아닌데다 열 여섯이나 되는 사람들의 낮 시간 알리바이를 통째로 파악하기도 어려우니.

그래서, 밤에 죽은 것도, 낮에 죽은 것도 아니라면 토미하레 소루는 대체 언제 살해당한 걸까 고민했지. 그때 눈에 들어온 단서들이 또 있었지. 바로 '냉동 창고', 그리고 'CD 플레이어'.

정말 터무니없는 추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토미하레 소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옛적에 살해당한 게 아닐까?"


이시미네 칸: "토미하레 씨가… 진작부터 죽어있었다?"

이나모리 쿠키: "훨씬 옛적이라면… 하루? 혹은 수 일 전…?"


아자부 이토리: "나는 직업상 시체를 볼 일도 있기 때문에 법의학에 대해선 가볍게 지식을 가지고 있어. 다들 익사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겨우 수 시간 빠져있었다고 사람 피부가 그 정도로 썩어빠지진 않아.

이미 세포가 붕괴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라면 모를까, 불어터지는 걸로도 모자라 쭈글쭈글한 주름에 변색까지 심하게 일어난 꼴을 보면 며칠 동안 바다 밑바닥에 있었거나, 혹은 이미 손상이 가해진 후에 바다에 빠진 거겠지.

전자는 아마 아닐거야. 쓰레기 수거선은 매일 같은 시간에 어촌을 순회하니까. 그렇다면 토미하레 소루는 대체 언제 살해당해서, 그 시체는 어디에 보관되어 있던 걸까."


쇼코라 치에: "하지만… 그건 아냐! 난 토미 오라비의 연주소리를 매일 밤 들었단 말야! 연구교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릴 듣고있으면, 어쩐지 집중할 수밖에 없게 돼서…."


"그건 미끼야, 바보 꼬맹이."


쇼코라 치에: "뭐?"


"매일 같은 시간 토미하레 소루의 연구교실에 있는 연주집을 재생해서, 마치 토미하레 소루가 그곳에 머무는 것처럼 꾸민 거라고. 그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처럼 카트로 식사를 주문했고, 만약 누군가 토미하레를 찾으면…."


아자부 이토리: "적당히 목격증언을 지어내서 떠벌렸겠지? '파트너'가 말야."


타키모리 유미코: "……."


아자부 이토리: "그런 식으로 토미하레 소루의 죽음을 오래도 꽁꽁 숨겨온 거지. 아마도… '어촌으로 온 첫째 날'부터. '냉동 창고'의 드라이아이스에 매몰시켜서 말야.

이게 범인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 꽁꽁 얼린 시체가 과학공상소설의 냉동인간처럼 영영 멀쩡할 거라고 착각한 거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당근머리. 똑똑히 알아둬. 치킨은 냉동보다 생닭이 맛있다고!"



…심각한 타이밍에서 비유가 이상해.



타키모리 유미코: "…토미하레 군이 오래 전에 죽었고 그를 냉동 창고에 보관했다? 일리는 있지만 너무 무리한 얘기 아닌가? 그런 사기극이 들키지 않을 리 없잖아?"


아자부 이토리: "맞아. 그래서 들킨 거지? 카미나기 한나에게."


타키모리 유미코: "…!"

"아…!"


아자부 이토리: "카미나기가 토미하레 소루의 시체를 발견했거나… 혹은 지나치게 두문불출한 토미하레 소루를 끈질기게 만나려고 했겠지. 너는 그 입막음을 위해 카미나기를 건드릴 수 밖에 없었던 거야. 네게 살인은 옵션이 아닌 필연이었고, 더 이상 토미하레의 시체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해 학급재판을 벌일 각오를 한 거겠지."


타키모리 유미코: "…그 애는 너무 많이 아는 게 문제였지. 항상."



무슨 10년지기는 되는 것처럼 말한다. 친해봤자 얼마나 친했다고.



아자부 이토리: "어쨌건, 살인을 저지를 각오를 한 너는 되도록 확실한 방법을 원했어. 파트너도 없고, 법의학 지식도 추리 경험도 없는 네가 쟁쟁한 브레인들을 상대할 자신도 없었겠지. 그래서 선택한 게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초… 존나 뛰어난 변호사야.

맹점이었지. 파트너 이외에도 공범을 끌어들일 거라는 발상은 누구도 하지 못했거든. 그런 시도를 할 미친 년이 있단 것도, 그런 걸 받아들일 미친 놈이 있단 것도 모두 예상 밖이었어.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있어야만 무라츠바키의 목격증언이 설명이 돼. 부둣가에서 공작을 행한 공범에게 거짓 알리바이를 만들어준 게 아니라면, 호텔 쪽에서 나타났다는 타키모리가 카미나기의 옷으로 갈아입힌 토미하레 소루의 시체를 바다에 던지고 폭죽을 터뜨리는 건 시간적으로 불가능하거든.

무라츠바키 마사오미가 재판 내내 보인 수상한 행동은 아까 바보키치가 다 짚어냈으니, 굳이 다시 지적하진 않겠어. …머저리 새끼."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

타키모리 유미코: "결국 또 표적수사의 결과네. 형편없긴. 자기 목숨이 걸려있는 살인게임에서 다른 사람의 변호를 하는 인간? 하하하! 세상에 그딴 게 어디있니?"


아자부 이토리: "…나도 그 부분만큼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타키모리 유미코: "뭐?"


아자부 이토리: "이유가 있었다면?"

아자부 이토리: "타인의 눈에는 바보같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으로 보여도,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그 자신에겐 반드시 당신을 변호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아자부 이토리: "한 사람의 변호사로서, 모든 걸 걸고서라도 당신을 지켜야 할 이유가 그에겐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 모든 모순이 설명되지 않을까?"


"그게 대체 무슨….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무고한 사람들 목숨까지 던져가며 살인자를 감싸줄 이유가 어디 있어?"


아자부 이토리: "살인자가 아니니까."


"…뭐?"


아자부 이토리: "타키모리 유미코는 살인자가 아니니까. 아니,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거겠지. 변호사로서 말야."


"그게… 무슨…?"

타키모리 유미코: "……."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


아자부 이토리: "타키모리 유미코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지. 왜냐면….

타키모리의 파트너인 토미하레 소루가, 그 자신을 살해했기 때문에."



"……!"

이시미네 칸: "자살…이라고요? 토미하레 씨가?"

후네즈 신지: "무흐훗♤ 혹시나 했는데, 역시. 목이 부러진 시체라는 것부터 뭔가 느낌이 오잖아? 학급재판이 시작한 뒤 마사 짱과 타키 짱이 가장 먼저 덮으려고 한 사실도 그거잖아. 피해자는 자살일 거라는 주장."

후네즈 신지: "'몸싸움의 흔적으로 보이는 외상' 따위야… 사후에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잖아?"

아리스 윈터우즈: "그런… 끔찍해요…!"



아자부 이토리: "…실제로 토미하레 소루가 자살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도가 없어. 하지만 여러 정황상 자살로 추측하는게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그리고 타키모리 유미코는 파트너의 자살을 숨기고 싶어했지.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데는 미식가가 꽤 도움이 됐어."


"응? 내가?"


아자부 이토리: "그래. 의도친 않았겠지만, 토끼녀가 범인으로 몰리면서 그 파트너인 미식가까지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점에서 힌트를 얻었지.

'학급 재판에서 태그로 맺어진 파트너는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과 보상을 공유한다'… 잊진 않았겠지?"


"……아!"



젠장, 그런 거였나…!



아자부 이토리: "사건 전개를 처음부터 정리해볼까.

어촌에 온 뒤, 토미하레 소루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목을 매고 목숨을 끊었어. 아마 부둣가나 냉동 창고 근처에서였겠지.

파트너의 죽음을 확인하고 혼란에 빠진 타키모리 유미코는 일단 시체를 숨기기로 해. 비록 토미하레 소루는 자살로 끝났지만, 만약 그 시체가 발견돼서 학급재판이 일어나고 그의 자살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그녀 자신까지 처형당할 위기니까.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 때문에 휘말려서 죽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을테고."


쇼코라 치에: "자, 잠깐만. '자살'도 '살인'에 해당되는 거야?! 어… 어째서 그렇게 되는데?! 그건 불합리하잖아! 게… 게다가 동조하지도 않은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저 파트너라는 이유만으로?! 그게 말이 돼?!"

후네즈 신지: "말이 되고 말고는 우리가 정할 게 아니지♤. 룰 공지는 이미 진작에 끝났어. 이제 와서 뒤늦게 어리광피우지 마렴."

쇼코라 치에: "이익… 익….!"


아자부 이토리: "…계속할게. 어떻게든 시체를 냉동창고에 숨긴 타키모리는 토미하레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밤 10시마다 그의 연구교실에 CD 플레이어를 틀고 식사 시간마다 카트를 올려보냈어. 마침 상담실 운영이 끝나는 시간과 맞물리니 그렇게 어렵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런 얕은 수로 토미하레의 부재를 숨기는 데엔 한계가 있었을 거야. 가장 먼저 이상함을 눈치챈 건 카미나기였고, 성격상 단도직입적으로 타키모리를 찾아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봤겠지.

영원히 파트너의 죽음을 감출 수만은 없다고 느낀 타키모리는 살아남기 위해 카미나기를 제거함과 동시에 학급재판에서 승리할 방도를 궁리했어.

무라츠바키 마사오미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손에 넣은 타키모리는 상담이 예정되어있던 시간에 카미나기를 부둣가로 불러들였어. 살아있는 토미하레 소루를 만나게 해주겠다, 이 정도 거짓말이면 충분했을 거야.

카미나기를 습격한 후, 타키모리는 냉동 창고에 보관해뒀던 토미하레 소루의 시체를 카트 째 끌고 부둣가로 옮겼어. 일반적인 얼음이라면 잘 녹지 않아 발견되지 않게 처치하기 곤란했겠지만, 드라이아이스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상온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금방 기화해 사라졌을 거야.

그 후엔 카미나기의 옷가지를 토미하레에게 갈아입힌 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망가뜨렸어. 그리고 토미하레가 잘 발견될 수 있도록 쇠사슬을 감고, 배를 타고 나가 시체와 얼음 상자를 유기했지. 폭죽은 배 위에서 터뜨리는 게 비교적 안전할테니 그렇게 했을테고.

폭죽을 보고 달려온 무라츠바키와 카라스야마. 무라츠바키 마사오미는 계획대로 부둣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시킨 뒤 카라스야마를 호텔로 되돌려보냈고, 배를 타고 돌아온 타키모리와 합류해 공작을 마무리짓고 알리바이를 확보했어.

밤새도록 이어진 수색에도 토미하레 소루와 카미나기 한나는 발견되지 않고, 이윽고 새벽이 되어 쓰레기 수거선이 돌아오고 나서야 모두는 물에 퉁퉁 불은 카미나기 한나…처럼 보이는 토미하레 소루의 시체를 목격하게 됐지.

이게 이번 살인사건… 정확히는 시체 유기 사건의 전말이야. 자살한 파트너, 그걸 숨기고 싶었던 년, 그걸 도와준 놈. 이 셋이 만들어낸 환장의 콜라보."


타키모리 유미코: "……와. 이건 인정할 수 밖에 없겠어. 진짜 똑똑하네, 이토리 양. 슌 군이나 타노 양도 마찬가지겠지. 어쩌면 처음부터 정공법으로 승산같은 건 없었겠네."



타키모리 유미코는 방긋 웃으며 박수를 짝짝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자부 이토리의, 그리고 모두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일그러져만 갔다.



타키모리 유미코: "100점 만점에 85점 정도 될까…."


아자부 이토리: "…그 나머지 15점은 네가 실토해. 그 이상은 더 도출해내기도 어려우니까.

토미하레 소루는 어째서 자살한 건지. 토끼녀는 어쩌다가 널 의심하게 된 건지. 그리고…. 저 머저리 변호사는, 아무리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곤 해도, 정말 자기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널 도울 생각이었는지. 이 세가지 만큼은 도무지 모르겠으니까."


타키모리 유미코: "뭐…. 좋아. 나쁠 거 없지.

소루 군은… 마음이 아픈 아이였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정신병자, 미친놈이었지. 그런 아이를 보듬어주는 게 내 역할이긴 하지만, 그는 정말로 통제 밖에 있는, 이미 끝장난 정신상태였다고.

그 아이는 화려한 죽음을 동경했어, 이토리 양. 이해가 가니?"


아자부 이토리: "……?"


타키모리 유미코: "첫 번째 학급재판이 끝나고… 켄마 군과 레이몬 하루히가 끔찍하게 처형당했을 때, 그 아이의 마음에 잠들어있던 죽음의 씨앗이 깨어나기 시작했어. 그 장면을 보면서도 소루 군은 '아름답다'며 연신 감탄을 감추지 못하더라. 그게 대체 무슨 의미냐고 따졌지만, 아름다움에 대해 알지 못하는 미개인이 무얼 이해하겠냐며 무시했지.

그 후 호텔로 돌아가 어떻게든 소루 군을 붙잡아서 대화를 나눴어. 대화라기보단 억지로 심리상태를 분석한 것에 가깝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지. 그 애는 몸은 살았지만 마음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어.

'천재는 요절한다', 그리고 '인간을 완성하는 것은 죽음이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역사상의 예술가들을 동경한 토미하레 소루는 학급재판에서 검정으로 지목되어 처형당하는 걸 바란 거야. 그러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 바로 다짜고짜 목을 메고 죽어버리는 거였지.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게 착각이었어…. 내 초고교급 상담사의 재능으로도, 이미 끝장나버린 마음을, 아니, 아예 인간의 것과는 다르게 태어나버린 그 마음을 되돌려놓을 수는 없었어.

소루 군은 죽었고, 나는 기어코 황제의 묘에 생매장당하는 노예 꼴이 되고야 말았지.

그것만큼은 싫었어. 그래서 시체를 숨겼고. 한나 양에게 진실을 들킬 위기에 처했지."


"……."


타키모리 유미코: "그런데 말야. 정말 웃긴게, 한나 양은 진상을 안 게 아니었어. 오히려 소루 군이 죽기는커녕 멀쩡하게 잘 살아있다고 생각했지.

한나 양이 소루 군을 찾아나선건 다름아닌 그 오해 때문이었어. 한나 양은… 소루 군이 안경 거치대를 죽이려고 한 범인이라고 생각했거든."


이시미네 칸: "뭐라고요?!"

"흰토끼가… 토미하레 소루를 의심했다?"


타키모리 유미코: "표정을 보아하니 파트너에게도 말하지 않은 모양이네. 아마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로 남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상냥한 아이라니까.

기억나겠지? 벌써 이틀 전, 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하던 안경 거치대 군을 누군가 책장을 떠밀어 죽이려 한 사건. 범인에 대한 힌트는 실루엣이 여자 같았다는 카라스야마 류이치의 증언 뿐. 아직까지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

한나 양이 소루 군을 의심한 건 그 때문이야. 여성의 실루엣이지만 책장을 밀어 넘어뜨릴만큼의 근력을 가지려면 범인은 분명 남성일 거라고. 그러니 토미하레 소루를 직접 만나 대화하게 해달라는 게 한나 양의 부탁이었지.

정말 혼란스러웠어. 자살해버린 파트너 때문에 곤란에 처한 나처럼, 한나 양은 엉뚱힌 오해를 해버렸기 때문에 나에게 원한을 사게 됐으니까.

하지만 '여성의 실루엣을 한 남성'이라는 말에서 트릭에 대한 아이디어도 떠올랐고… 뭐. 그런 거지. 그래서 그 다음날 한나 양을 불러들였어. 소루 군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뭐, 저승에서 만나는 것도 만나는 거긴 하니까 거짓말은 안 한 셈이지?"


아자부 이토리: "이게 진짜로…!"


타키모리 유미코: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리 죄가 없대도 어떻게 무라 군을 범죄에 꼬드겼는지…가 궁금하댔나? 그거, 알려줄게."




숨막히는 안개의 천막 속에서, 모든 진실을 밝힌 타키모리 유미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타키모리 유미코: "내 '재능'이 있다면 세상에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


아자부 이토리: "뭐…?!"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그… 그게 무슨…."

"……! 설마…! 이 미친 여자가…!"




-



타키모리에겐 사람을 매료시키는 압도적인 마력이 있다.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엄청나다거나 쇼코라 치에처럼 애교를 잘 부린다던가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말솜씨가 귀신같이 뛰어나다거나, 논리가 대학 교수보다 정연하다던가 하는 문제도 아니다.

'언어의 질량이 다르다'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이 타키모리의 재능적 특성을 설명하는 가장 훌륭한 문구다.

쇼코라의 재능이 맛있는 디저트를 만드는 것이라면 타키모리는 말로 상대의 호감을 사는 게 재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어지간히 마음의 문을 걸어잠근 사람이라고 해도 타키모리와 단 둘이 대화를 나누다보면 30분 안에 무장해제되어 모든 속마음을 털어놓게 된다.

마음만 먹으면 싸이코패스 사형수를 회개시킬 수도 있고, 여러번 자살 시도를 한 우울증 환자를 엔돌핀이 폭발하는 조증 환자로 만들어놓을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




"너… 너 설마. '초고교급 상담부원'의 재능을…!"


타키모리 유미코: "응? 아하…. 시청자 대표들이 받은 자료에 내 재능에 대해서 적혀있기라도 했나봐? 그렇다면 이해가 빠르겠네. 후후."

타키모리 유미코: "맞아. 내 재능. 초고교급 상담부원. 난 사람의 속마음을 헤집고 뇌를 손안에 쥔 채 주물거리는 게 특기인 사람이야. 사람 하나 내 편으로 만드는 거, 사람 하나 제 구실 못하도록 절망시키는 거. 내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타키모리 유미코: "이건 이미 재능의 영역을 넘어섰을 지도 모르겠네…. 재능이 아니라 능력이라고 불러도 좋아. 마치 이토리 양이 에구이사루에게 짓밟히고도 살아남아 금세 회복한 것처럼, 내게는 그런 특수함이 있는 거지."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그 말은… 당신이… 나를 세뇌라도 했다는 겁니까…? 이 무라츠바키 마사오미를…?"

아야키치 슌: "……."


타키모리 유미코: "어머? 그게 무슨 실례되는 소리? 세뇌랑은 엄연히 다르지. 나는 그냥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을 뿐이라니까?

잘생긴 남자를 꼬시는 재주가 있다고 해서 그걸 세뇌라곤 부르지 않잖아?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마. 비록 설득당한 건 내 재능 때문일지라도, 나를 위했던 무라 군의 마음 역시도 어엿한 '진심'이니까."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


타키모리 유미코: "흠. 사실 나도 이 정도까지 가능할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지만, 내 연구교실을 조사하다가 재미있는 문서를 발견했거든. 잠깐 읽어줄까?"



타키모리는 품속에서 얇은 서류철을 꺼내들고 그 중간 쯤 되는 페이지를 펼쳤지만, 잠시 고민하더니 이윽고 다시 서류철을 닫았다.



타키모리 유미코: "아냐, 됐어. 어차피 곧 다 죽을 건데 뭐. 기분만 더 나빠지겠지."


아자부 이토리: "그게 무슨 개소리야. 뒤지는 건 너야, 타키모리 유미코! 이봐, 모노사메! 진상을 모두 밝혔으니 얼른 투표를…."


타키모리 유미코: "……이토리 양. 이게 전부 너 때문이잖아."


아자부 이토리: "……?!"



갑작스레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리는 타키모리의 음성에, 이토리는 마치 머리채를 쥐어뜯긴 것처럼 사나운 눈을 뜨며 타키모리를 쏘아보았다.



아자부 이토리: "…그게 …무슨 소리야?"


타키모리 유미코: "소루 군이 자살한 것도, 내가 한나 양을 죽여야만 했던 것도, 우리가 이렇게 갇혀서 살인게임 따윌 강요받고 있는 것도 전부 다 이토리 양 때문이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아자부 이토리: "그…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타키모리 유미코: "이토리 양은 주위에 재앙을 몰고다니는 사람이잖아. 경호 임무를 맡을 때마다 꼭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생기지. 반드시 저격수가 나타나고, 폭탄 테러에 심하면 비행기 납치… 매번, 매 임무마다 그랬다면서? 그게 어떻게 우연이겠어?"


아자부 이토리: "아, 아니야…. 그건 내 잘못이… 아, 아니라고…! 이제와서 내 과거를 들먹여서 뭘 어쩔 셈이야!"


타키모리 유미코: "시치미 떼지 마.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저주받은 거야, 이토리 양은. 끊임없이 주변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저주. 한나 양이 죽은 것도 이토리 양과 친했기 때문. 우리가 피에로의 표적이 된 것도 다 이토리 양이 불운하기 때문. 주위를 끝없는 파멸로 이끌어들이는 민폐녀라고."


아자부 이토리: "그만… 그만해…!"


타키모리 유미코: "정신병이라는 이름으로 편해지려고 하지 마, 이토리 양. 이토리 양의 생각이 맞으니까. 모든 불행이 자신 때문이라는 그 생각, 착각이 아닌 정답이야. 이토리 양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 착각을 할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토리 양이 우릴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소루 군처럼 목을 메고 죽어주는 일이 아닐까?'


아자부 이토리: "그만… 그만…. 그만해……. 제발…."


타키모리 유미코: "아, 맞다. 이토리 양의 가족. 전부 죽은 거 알아?"


아자부 이토리: "……?"


타키모리 유미코: "유서 깊은 보디가드 집안, 아자부 일가 몰살. 외동딸은 행방불명…. 며칠 전 누가 신문 스크랩 해 둔 걸 보여줘서 알았거든. 아… 그 반응을 보니, 전혀 몰랐나 보구나?"


아자부 이토리: "그게… 그게 무슨… 그게 무슨 어이없는…."


"젠장, 뭘 하는 거야! 거짓말일 게 뻔하잖아! 저딴 말에 속아넘어가는 거냐?!"


아자부 이토리: "우, 우으…. 으으으으…."


타키모리 유미코: "이야, 대단하네. 가족까지 죽여놓고 이젠 죄 없는 고교생들까지 몰살시키려고 여기에 기어들어온 거야? 제발, 양심이란게 있다면 죽어주면 안될까? 어딘가의 외딴 섬에서, 조용히. 아무런 의미도 없이 혼자 죽어달라구. 부탁이야."


아자부 이토리: "……."

아자부 이토리: "…… ……."

아자부 이토리: "아, 네…. 그럴게요…."


"……! 젠장, 너도 고장이냐…? 어떻게 파트너가 쌍으로 유리멘탈이야?! 정신차려 병신들아. 다 왔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고!"


타키모리 유미코: "어디보자… 다음은, 치에 양."

쇼코라 치에: "흡?!"

타키모리 유미코: "치에 양. 치에는 언니 믿지?"

쇼코라 치에: "네…에?"

타키모리 유미코: "치에 양의 고민, 언니가 전부 들어줬잖아. 언니가 살인 따위 하지 않다는 거, 치에만큼은 믿어줄거지?"

쇼코라 치에: "에, 에, 그, 그, 그치만… 방금까지… 그… 자백을…."

타키모리 유미코: "믿어주지 않으면… 언니는 콱 죽어버릴 지도 몰라. 학급재판 때문이 아니라, 슬퍼서. 믿어주지 않아서. 치에 때문에… 언니가 그렇게 되어도 괜찮아?"

쇼코라 치에: "아… 안돼… 안돼! 그건 안돼! 언니가 나 때문에 죽는 건 싫어! 죽기보다도 더 싫다고!"

쇼코라 치에: "그, 그냥 내가 죽는 게 더 나아. 내가 죽을게! 그게 낫잖아!"

타키모리 유미코: "…옳지."

유키야마 카무이: "꼬맹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젠장,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모노사메, 제지하라고! 얼른!"



타키모리 유미코: "쿠키 양. 쿠키 양의 부모는 참 나쁜 사람이었지. 평생 사랑은커녕 증오조차도 주지 않았으니."

이나모리 쿠키: "…!"

타키모리 유미코: "생존을 위해 악착같이 버티는 건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만큼의 가치는 없는 인생이잖아? 아무도 쿠키 양을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쿠키 양을 증오하지 않아. 사라지든 말든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아. 그저 티끌 하나, 계곡의 조약돌, 사막의 모래알 같이 무의미한 존재.

인간, 실격."



이시미네 칸: "당장 그만두세요, 타키모리 씨! 당신, 어디까지 떨어질 셈입니까! 당신의 재능에 대고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상담사라는 인간이 대체 무슨 말들을…!"

타키모리 유미코: "아, 안경 거치대. 너에겐 참 하고픈 말이 많은데 말야. 너, 대체 정체가 뭐니?"

이시미네 칸: "저는 아카식의 사서 이시미네 칸입니다! 작가 아리스 윈터우즈의 팬이고요! 다른 정체성따윈 필요 없어요!"

타키모리 유미코: "그래? 아리스 윈터우즈의… 팬. 그런데 말야,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닐수도."

이시미네 칸: "…?"

타키모리 유미코: "아, 됐다. 너는 내 상담실을 거치지 않았으니 멘탈 공격은 안 통하겠지. 대신 잘 지켜봐. 네가 그렇게 존경하는 선생님이 무너지는 걸.

아리스 양. 슬슬 밝혀도 될까? 그 비밀."

아리스 윈터우즈: "……! 아아!"

이시미네 칸: "당신! 뭔진 모르겠지만 그만두세요!"

타키모리 유미코: "그 아리스 양이… 전세계 아이들이 선망하는 동화작가인 아리스 양이 창작욕을 채우기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버려도 괜찮아? 응?"

아리스 윈터우즈: "아… 안돼요… 그것만은 안돼요… 그것만은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시키는 일은 다 할테니까 그것만은 비밀로 해주세요!"


시가라토 유즈: "이 비열한 인간이…! 상담 내용은 비밀에 붙이는 게 당신네의 기초적인 직업 윤리 아니야?!"

타키모리 유미코: "흥. 직업 윤리는 무슨, 이 자리에 윤리적인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의뢰인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고 증인을 협박, 매수했지. 시가라토 유즈. 취재 도중에 폭행, 주거 무단침입, 절도 등의 범법행위를 저질렀지.

시청자 대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들 떳떳하지 못한 과거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있잖아? 너희에게 나를 단죄할 자격 따위가 있을까?"


시가라토 유즈: "윽…!"


타키모리 유미코: "자, 얘들아. 너희가 얼마나 가치없고 부도덕한 존재들인지 잘 알아들었으면 이제 내 부탁을 들어주렴. 나를 살려줘. 너희들보다 훨씬 사랑받고,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나를 구해줘. 너희들의 목숨, 내가 잘 쓸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내게 투표하지 말아주렴?"


"말 같지도 않은…! 아무리 그래도 그딴 게 통할 리가 없잖아! 진짜 마녀라도 되는 게 아니라면…."


쇼코라 치에: "네에… 언니…. 언니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 같은 건…."

유키야마 카무이: "쇼코라!!"


"이봐! 유키야마, 막아! 투표 못 하게 하라고! 젠장, 이게 대체! 이게 대체 무슨 학급재판이야?!"


타키모리 유미코: "…류이치 군. 이건 게임이나 예능이 아니잖아.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라고. 더러운 수라도 가진 패라면 써먹어야지. 그게 나빠?"


"타키모리 유미코… 너 진짜 이렇게까지 최악이었냐? 초고교급 상담부원이 이런 악마같은 여자였어?"


타키모리 유미코: "…흐음. 이상하네. 너무 쌩쌩해. 분명 카라스야마 군도 나와 상담을 하지 않았었나?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분명 그때 마음을 꿰뚫어놨다고 생각했는데. 뭐야? 무재능 주제에 건방지게."


"머릿속에 똥밖에 안 찬 버러지라서 그런 거겠지. 상담실에 있을 때 네 말따윈 듣지도 않았어. 망사스타킹 입은 다리가 자꾸 맞닿아서 그거 가라앉힌다고 바빴거든."


타키모리 유미코: "……상상 이상으로 쓰레기 같은 남자네. 뭐, 상관 없어. 이미 충분한 인원들이 내 편으로 넘어온 것 같으니까. 슌 군, 이토리 양, 치에 양, 나, 아리스 양, 신지 군, 마사오미 군, 시가라토 양… 어머. 벌써 과반수네. 설령 지난번처럼 누군가 난입한다해도 최소 동점이야. 난 살아나가고, 너희들은 모두…. 결국 '진실'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거지."



…….


진실이 중요하지 않아?




"…킥. 마치 모든 진실이 밝혀진 것처럼 이야길 하는군."


타키모리 유미코: "…뭐?"


"아직까지도 밝히지 않은 거짓말이 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나? 타키모리 유미코. 학급재판의 승리는 가져가더라도 네깟 년이 그 가짢은 체면 세우게 내버려둘 순 없지.

토미하레 소루의 자살. 그거, 네가 자살하도록 만든 거지?"


타키모리 유미코: "……그게 무슨 영문 모를 소리야."


"토미하레 소루는 자살. 넌 억울하게 죽기 싫어서 살기 위한 범행을 계획했다? 그렇다면 말야. 어째서 토미하레 소루가 죽었을 때, 그 시체를 곧장 바다 밑바닥에 쳐박지 않은 건데?"


타키모리 유미코: "……!!"


"이상하잖아? 아름다운 죽음을 그렇게나 동경한다는 녀석이 고작 목매달고 자살하다니. 앞뒤가 안 맞아. 머리에 꽃이라도 꽂고 죽은 게 아니라면.

시체를 숨기고 싶으면 평생 찾지 못할 곳에 가라앉히면 될 걸 뭐하러 냉동 창고같은 곳에 숨겼을까? 토미하레 소루가 자살하기 이전부터 넌 이 범행을, 이 트릭을 계획하고 있었던 거야. 곧 죽어도 자신은 죄가 없다는 최후의 체면치레까지 고려하면서 말야.

…역겨운 년. 네가 여기서 살아나가도 떳떳하게 살 수 있을까?"


타키모리 유미코: "입닥쳐! 네까짓 게 뭘 안다고 그래! 함부로 말하지 마! 재능도 없는 버러지 주제에! 토미하레 소루는 자살이야! 내가 관여한 게 아니라고!"


"크윽…!"



초고교급 상담부원의 분노가 뚜렷한 질량을 가지고 울려퍼졌다.

마지막 반격은 고작 타키모리의 화를 돋우는 게 전부인 걸까.

이젠 '나'마저도 의식이 흐려진다.

짙은 안개가, 밤의 어둠이 학급재판을 뒤덮었다.

진실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그 달콤한 거짓말에 모두가 속아넘어간다.

…이런 결말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타키모리 유미코: "이제 끝이야. 날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모두, 편안한 잠을 자는 거야. 안개 속에서, 누구도 아프지 않은 편안한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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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모리 유미코: "읏?!"


"…?!"


아야키치 슌: "……빛?"


아자부 이토리: "으……? 눈 부셔…?"






그때 우린, 빛을 보았다.

짙은 안개를 뚫고 비추는 빛의 길을.

검은 바다를 헤매다 돌아오는 이를 인도하는 그 따사로운 빛을.




줄곧 꺼져있던 부둣가의 등대가, 저 멀리서 우리들을 똑바로 비추고 있었다.

마치 말을 거는 것처럼.

진실은 절대로,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고.







"…거기 있었냐. 흰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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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 카미나기 한나 ???
A] <시청자 대표> 카라스야마 류이치

B] <초고교급 보디가드> 아자부 이토리
B] <초고교급 갬블러> 아야키치 슌

C] <초고교급 JK???> 쇼코라 치에
C] <초고교급 ???> 유키야마 카무이

D] <초고교급 상담부원> 타키모리 유미코
D] <초고교급 현악부원> 토미하레 소루 DEAD

E] <시청자 대표> 레이몬 하루히 DEAD
E] <초고교급 펜싱선수> 키리누키 켄마 DEAD

F] <초고교급 실험부원> 타노 나타타
F] <초고교급 대장장이> 타치바나 츠나요시

G] <초고교급 랭킹메이커> 이나모리 쿠키
G] <초고교급 사서> 이시미네 칸

H] <초고교급 동화작가> 아리스 윈터우즈
H] <시청자 대표> 후네즈 신지

I] <시청자 대표> 시무라 카리나 DEAD
I] <초고교급 변호사>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J] <초고교급 르포기자> 시가라토 유즈
J] <초고교급 연극배우> 키쇼


모노쿠마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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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 챕터 2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