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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발언자의 신원을 표기하기 위해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



천공호텔 단간론파 ch.3 일상편

<빨간 망토, 늑대 그리고 사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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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체스판. 마주보는 병정들.

똑딱이는 메트로놈.

붉은 조명.



현실의 공간은 아닙니다. 아마도 환상, 어쩌면 꿈 속.

그래. 저는 지금 기분나쁜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도 등대 이후로 벌써 두 번째 같은 꿈.

...꿈 속의 공간마저 금세 냉정하게 파악해버리는 자신의 기질에는 정말인지 질려버릴 것 같습니다.




검은 머리카락.

11세 정도로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

기울어짐 하나 없이 다소곳하게 의자에 앉은 소녀는 새하얀 토끼 인형을 꼭 쥐고 있습니다.



그 인형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소녀가 잘 때나, 식사할 때나, 나들이 갈 때에나 늘 들고다니던 소중한 물건.

헤지기 쉬운 재질이라, 어설픈 솜씨로 손가락을 찔러 가며 바느질을 하곤 했던....

...저는 어째서 이런 걸 알고있는 걸까요.



환상 속 검은 머리 소녀는 사실 어릴 적의 저 자신.

그런 터무니없는 클리셰따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

아주 미세한 차이라도 닮은 것과 같은 것은 구분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저를 빼닮았고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인형을 쥐고 있지만, 단언할 수 있습니다.

소녀의 정체는 제가 아닙니다.

저의 백발은 선천적인 이형異形이자 돌연변이.

그렇다면 대체....



"...돌려줘...."



...대체 이 소녀는 누구란 말입니까?



"내 몸을 돌려줘!"


-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는 꿈, 정말로 싫어요. 눈 뜨자마자 싫은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건 더더욱 싫고요."


악몽에서 깨자마자 보이는 얼굴은 파트너인 카라스야마 류이치.

어째선지 제 침대 옆까지 의자를 끌고 와 책을 읽고 있는 그의 개성은 '무재능. 무책임. 무지성'의 3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반질반질한 미소. 그럴싸하게 만들어낸 가짜 표정.

저와 그의 아침은 언제나 이렇듯 어제를 지우고 서로를 속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악몽을 꾼 것 치곤 너무 잘 자던데? 잠든지 벌써 거의 스무 시간은 지났어."

"어쩐지 허리가 심상찮게 아프다 했더니.... ...카라스야마 씨. 그런데 저, 난로 옆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요."

"아아. 감사 인사는 안 해도 돼. 하지만 다이어트는 좀 해야겠더라고. 침대까지 옮기는데 몇번이나 무릎 꿇을 뻔 했어."

"옷은 또 누가 갈아입혔죠? 잠들 땐 아직 세라복 차림이었는데."

"아, 그게...."

"...잠든 새 누가 왔었나보네요. 아마도 슌과 이토리 양. 옷을 갈아입힌 건 그녀인가요."

"킥. 농담할 새도 없이 다 알아맞춰버리지 말라고. 재미없게."

"당신 농담이 더 재미없으니까요...."



천근같은 몸뚱이를 억지로 일으켜세우기 무섭게 쏟아지는 끔찍한 두통을 애써 무시했습니다.

아직 실감나지 않는 토미하레 군과 타키모리 양의 죽음. 이어지는 악몽.

꿈에서 깨고 나니 오히려 현실감이 옅어지는 건 어째서일까요.



"좀 더 누워있지?"

"계속 시간 낭비를 할 순 없어요. 학급재판 이후잖아요.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대화를 나누고 진정시켜야 해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

"타키모리 유미코와 토미하레 소루의 죽음으로 이미 이 호텔의 공기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까지 떨어졌어. 네가 나선다고 어떻게 해결 될 일이 아니야, 흰토끼."

"그건 당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에요. 타키모리 양의 빈 자리가 문제라면 누군가 채우면 되잖아요. 그게 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그런 문제가 아냐. 전혀 이해를 못하네."



카라스야마 류이치는 읽던 책을 덮으며 몸을 일으켜세웠습니다.

조지 오웰의 1984.

분명 그가 마음에 들어 할 만 한 테마입니다만, 읽는 척만 하고 있던 게 아닐까 의심가는 건 어째서일까요.

카라스 씨가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타키모리 유미코와 토미하레 소루, 그 두 사람은 불신이라는 재앙의 씨앗을 뿌린 거야. 파트너를 신뢰할 수 없다. 언제 내 파트너가 배신할 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닐 지 알 수 없다. 파트너 때문에 처형당할 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엔 파트너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다.... 최소한의 생존권조차 가장 가까운 타인의 손에 빼앗길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이상, 이 호텔에서 남에게 의지한다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과 다름없다고."

"......."

"특히 남학생들과 같이 지내야하는 여학생들은 불안이 피크에 달했다고. 지금 자기 방에서 쫓겨나 노숙자 처지가 된 남학생들이 한 둘이 아니야. 알겠어, 흰토끼? 이 호텔의 생존자 열 다섯 명. 그 중 네 소꿉장난에 어울려줄 '친구'같은 건 이제 어디에도 없어. 적도 동지도 없어. 모두가 서로를 의심하는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고."

"...당신은요? 당신은 믿을 수 있나요?"



제가 당신을 믿어도 되나요? 혹은 당신은 저를 믿을 수 있나요?

말을 뱉고 보니 다소 중의적인 표현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카라스야마 류이치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휙 돌렸습니다.



"그걸 고민하는 시점에서 이미 더할 나위 없는 병신이지."


...어느 쪽으로 받아들인 대답인걸까요.


"...역시 그렇겠죠. 카라스야마 씨, 그런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있다면 지금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세요."

"자다 깨서 무슨 호박씨 까는 소리야? 하찮은 시청자 대표만큼 숨길 것 없는 인간이 또 어디 있다고."

"...그런가요. 거짓말쟁이에게 솔직하게라는 말을 꺼낸 저도 참 바보같네요."



이미 모두들 흩어진 뒤라면 굳이 외출을 서두를 이유도 없겠죠. 카라스 씨의 말도 항상 틀린 구석만 있는 건 아닙니다.

잠깐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도.



"...바둑은 둘 줄 아시나요?"

"바둑? ...교내 대회 입상할 정도는 되지만, 지금 여흥을 즐길 기분은 아니야."

"소원 걸고 내기바둑으로요. 석 점 드리죠. 대신 한 수에 2초, 제한시간을 두는 걸로."

"내기바둑? 석 점? 진심이야?"



뒤돌아있던 카라스야마 씨가 휙 시선을 돌립니다.



"석 점이면 부처가 와도 이기지. 좋아. 판 깔아. 엉덩이로 춤을 추게 해 주지."


-




-



"......또 졌네. 점수 셀 것도 없겠어. 두손두발 다 들었다."


사각 트렁크 팬티 한 장만 달랑 남은 채 바둑판 앞에 무릎 꿇은 카라스 씨가 곤란하게 웃음지었습니다.

비쩍 말랐거나 올챙이배가 나왔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탄탄한 근육이 의외라면 의외.


"부처가 아니라 수라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 그래도 좀 너무한 거 아냐? 실력이 왜 이래? 무슨 초고교급 바둑기사냐고."

"그럴리가요. 프로는커녕 아마추어 대회에도 츨전해 본 적 없는 걸요. 인터넷으로나 가끔 대국을 즐길 뿐이라, 제대로 된 기력은 아마 당신보다도 떨어질 거에요."

"팬티 빼고 다 벗겨놓고 할 말이냐. 그렇담 이 압도적인 결과는 대체 뭐야?"

"...바둑은 확률이나 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실력의 싸움입니다만, 제한시간이 걸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죠. 그때부터는 침착함과 도박수의 영역이에요. 쫓아오는 시간 제한에 성급하게 수를 뻗는다던지, 상대의 얕은 함정수에 보기 좋게 걸려든다던지.... 바둑이라는 스포츠가 인간의 인식적 한계와 만나 도박으로 변질되는 거죠. 물론 입신의 경지에 이른 고수를 상대한다면 의미없는 페널티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요."

"쳇. 이거 순 사기였잖아.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와 도박을 하라니."

"사기라니요. 당신이야말로 기력을 숨겼잖아요? 패배하긴 했어도, 이 정도면 교내 대회가 아니라 어지간한 아마추어 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는 될 텐데."

"...과대평가야. 그래서, 소원이 아직 하나 남았는데? 마지막 남은 팬티까지 벗겨갈 생각인가? 잊었을까봐 말해두는데, 나도 아직 첫번째 학급재판때 소원권 받아둔 게 있다고? 이 흐름대로라면 눈이 맞은 남녀가 혈기를 주체 못하고 뜨거운...."

"안타깝지만 그런 취미는 없네요. 마지막 소원은 '옷 챙겨입고 따라나와'입니다. 맵이 열렸으면 탐사를 해야죠. 보디가드까진 바라지 않을테니 동행해주세요."

"아... 그러셔."



기절하듯 잠에 빠지고서 벌써 스무 시간 이상이 흐른 지금.

아니나다를까 이미 살인게임의 배경은 어촌을 벗어난 지 오래였습니다.

또다시 단독으로 행동하다가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그때야말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저는 굳이 카라스야마 씨를 수행원 삼아 탐사에 나섰습니다.

호텔을 나서자마자 눈을 찌르는 따사로운 햇빛.

안개와 달빛 속에서 보낸 지난 며칠간이 무색하도록 생명력이란게 느껴지는 그 온도에 그만 멍하니 정신을 놓고 말았습니다.

기세 높게 뻗은 녹림과 세차게 흐르는 저 푸르른 폭포. 지저귀는 뻐꾸기와 갸르릉대는 들짐승.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썩어가는 해안 부락의 한켠이었건만, 지금 이 광경은 그야말로 동화 속의 숲 속과 같았습니다.

바늘에 찔려 잠든 공주, 독사과를 먹고 얹힌 공주, 탑에 갇힌 금발의 공주.... 그런 신비로운 이야기가 얽혀있을 것만 같은 저 어두운 숲에서 우린 또다시 살인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는 걸까요.


"으~ 싫어라. 늑대라도 나와서 한입에 잡아먹힐 것 같잖아. '빨간 망토'처럼."

"...저는 백설 공주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같은 풍경을 보고 이렇게 감상이 다를 수가 있죠? 감성이 너무 비틀린 거 아닌가요?"

"글쎄. 어느 쪽이 정상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내가 평범한 감상에 더 가까울 걸. 뭐, 둘 다 동화를 연상시켰다는 점에서 타협하자고. 아아~ 살아있는 동물의 소리라니, 이게 얼마만에 느끼는 생명의 기운이람. 가상현실이라지만 기분 좋은 걸."



혹시나 녹음된 가짜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기우였던 듯, 숲에 들어간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저흰 온갖 벌레와 산짐승들의 습격을 받아 쫓겨났습니다.

지네가 구두에 들어가질 않나, 벌집을 건드려서 쫓기질 않나, 뱀이 꽈리를 틀고 노려보질 않나....

생명력이 과해도 너무 과한 건 아닌가요, 이 숲?

어이가 없을 정도의 불운과 사고의 연속으로 결국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자, 안 그래도 험악했던 저희 사이의 분위기는 한층 더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좀 곱게 지나갈 순 없냐? 어떻게 네가 고르는 길목마다 뱀이 튀어나오지?"

"당신이 바보같이 벌집만 건드리지 않았어도 지금쯤 어디 한 곳은 조사했겠네요."

"이게 진짜, 콱 찔러죽여버릴까보다. 계속 까불래? 아까 한 말은 어디로 들어먹었어?"

"당신을 한 번도 신뢰한 적 없으니 타인을 믿지 말라는 조언이 의미있을 리 없잖아요."

"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

"...미안해요. 좀 날카로웠네요. ...계획을 수정하죠."

"계획 수정?"

"이대로 호텔에만 갇혀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아예 뱀이나 벌 따위는 얼씬도 못하도록 중무장을 하는 거에요."

"하아? 그렇게까지 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허무하게 시체가 되기 싫으면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독사한테 물려서 학급재판이라니, 그런 건 사절이라고요."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카미나기 씨. 이 숲의 생물들에겐 독이 없으니까요."

"어...."


잠에서 깨어난 뒤로 처음 듣는 카라스야마 이외의 목소리.

호텔 안쪽에서 공기와도 같은 존재감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건 이시미네 칸, 초고교급 사서였습니다.

아직 깁스도 풀지 않은 그. 어째 안색도 별로고 머리도 떡진 게 평소보다도 더 초췌해보였습니다만, 일단은 기분좋게 피어나는 왠지 모를 반가움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로 했습니다.



"어머어머, 이시미네 군! 오랜만이에요!"


"...감금 살인게임에서 오랜만이라는 말을 듣는 건 참 색다른 기분이군요. 얼마나 서로 관심이 없으면.... 몸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당신을 마취하는데 쓰인 약물, 과용하면 쇼크사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이었습니다. 움직이는 게 너무 섣부른 건 아닙니까?"


"걱정은 감사하지만 어디 맘편히 누워있을 수가 있어야죠. 이시미네 군이야말로 좀... 행색이."


"아, 깁스는 며칠 더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움직임에 큰 불편은 없지만요."


"아뇨. 깁스 말고도 좀...."


"아.... 그게."



이시미네 군은 깁스 하지 않은 쪽 손으로 떡진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쫓겨났지 뭡니까. 잠탱이 꼬맹이한테."


"쿠키 양에게요?"


"네, 그 녀석. 원래도 저를 싫어했지만 이젠 아예 사색을 하며 개인실에 발 한짝도 못 들여놓게 합니다. 지난 학급재판 때문에 파트너를 더욱 경계하게 된 모양이에요. 거북이처럼 쏙 들어가 숨었습니다."


"아하.... 학급재판 이후 돌아가는 분위기는 카라스야마 씨에게 대략적으로 전해 들었어요. 이시미네 군도 그 피해자였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부상당한 몸이다보니 이쪽도 혼자 다니기 무서운 건 마찬가진데, 정말인지 이기적인 꼬맹이라니까요. 제 하나 살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다지 화가 난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생각할 거리가 좀 있는 듯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낼 뿐.

이시미네 군은 도서관의 괴한에게 습격당한 뒤로 어쩐지 어른스러워진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시미네 군. 숲의 생물들에게 독이 없다는 게 무슨 의미죠?"


"아. 말 그대로. 저 숲에 득실득실한 뱀이나 곤충들, 전부 독성이 없는 종입니다. 다소 따끔할 수는 있어도 한 두 대 물린 것 정도로 생명의 지장을 받을 일은 없다는 거죠."


"그게 정말인가요? 으음, 무작정 도망쳐나온다고 그런 건 확인하지 못했는데. 조금 더 침착할 걸 그랬네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다소 까칠하게 치고들어오긴 했지만 카라스야마 씨의 질문은 적절했습니다.



"맵을 옮긴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걸 전부 파악해? 초고교급 사육위원이라도 되나?"


"그야 생태학적 지식 정도야 가볍게 겸비하고 있습니다만... 말씀하신대로 숲의 생물 하나 하나를 관찰하려면 시간이 부족하겠죠."



평소였으면 짜증을 냈을 법한 상황에도 되려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이시미네 군.



"그럼에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숲의 동식물이 무해하다는 걸."


"그러니까, 그 말을 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니까."


"이 숲을 알고 있으니까요."


"뭐?"


"......어째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이 숲은 익숙합니다.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아니,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이시미네 군...?"


"...지난번 도서관에서 습격을 당한 이후, 그리고 두번째 학급재판이 끝난 뒤.... 조금씩이지만 머릿속에서 뭔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어떤 흐릿한 이미지 같은 게, 마치 어떤 암시처럼."


"......."

"뭔 소릴 하는 거야, 저거? 멀쩡해진 줄 알았는데 더 맛이 간 건가?"


카라스야마 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지만 이시미네 군은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카미나기 씨. 카미나기 씨도 비슷한 증상을 겪고있진 않나요?"


"...저는...."



대답을 망설였습니다만, 곧 제게 주어진 선택지가 별로 없다는 걸 깨닫고 순순히 입을 열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상황이 맞아요. 타키모리 양에게 공격받은 뒤로부터...."


"역시 그렇군요. 그렇다면 환상을 보는 조건은 어떤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받았을 때 만족되는 거라고 짐작해도 되겠군요."


"하지만 저는 이시미네 군의 경우보다도 훨씬 더 기이하고, 꿈에 가까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붉은 방에서, 저를 닮은 어린아이와 만나는... 이시미네 군은... 이 증상의 의미를 아시나요?"


"저도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스트레스가 과했던 건지, 아니면 이 흐릿한 기억에 정말로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는.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기억 속의 저 숲은 인간에게 무해하다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숲이에요."


"'그렇게 만들어진' 숲이라...."



가상현실 속의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이라면 분명 인간의 존재를 배려하는 게 어색한 일은 아닙니다만,

이시미네 군의 말하는 방식은 어쩐지 그런 의미가 아닌 듯 했습니다.

게다가 이시미네 군의 기억은 어째서 가상현실 속 숲의 속성을 알고있는 걸까요?

아니, 그 환상은 정말 기억이 맞긴 한 걸까요?

...온통 알 수 없는 것 뿐입니다.



"이시미네 군,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 다른 분들은 없나요?"


"이봐, 카미나기. 저런 사이비 교주같은 소리에 휘둘려서 어쩌자는 거야?"


"...아직 확실하게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이시미네 씨는 잠시 망설이다 이윽고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습니다.


"아자부 이토리. 타치바나 츠나요시. 꼭 대화를 나눠보시길 바랍니다. 타치바나 씨는 분명히 뭔가 숨기는 게 있고, 아자부 씨는.... 본인의 연구교실에서 뭔가 찾은 모양이더군요.


"?"


"자세한 건 직접 확인하세요. 전 도무지 그 괴팍한 사람한테 말 걸 용기가 없으니까요. 저 폭포 쪽으로 쭉 따라가면 아마 만날 수 있을 겁니디. 그럼 이만. 전 오랜만에 서고를 정리하러 가겠습니다."



'오랜만'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시미네 군은 절뚝 절뚝 호텔로 다시 걸어들어갔습니다.

...어쩐지 통달한 현자 이미지가 된 이시미네 군에게는 적응하기가 어렵네요.

한편 카라스야마 씨는 자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에 잔뜩 심통이 났는지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습니다.



"...환상은 또 무슨 얘기야? 돌아가는 상황이 워낙 맛이 가서 헷갈리나본데, 이 살인게임의 근원은 그냥 좆같은 TV 쇼라고. 숨겨진 진상, 사라진 기억. 고작해야 예능 프로그램에 그딴 게 있을 리 없잖아?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테러범들의 꼬리를 잡는 거야. 이런 건 모두 시간 낭비라고."


"글쎄요.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건 어째서일까요."


"뭐?"


"'단간론파'는 그저 평범한 쇼 프로그램일 뿐이다.... 정말 그런가요? ...이상하잖아요. 가상현실 살인게임이라는 개념부터 너무 초과학적이에요. 형평성을 위해 '단간론파'에 대한 참가자들의 기억을 모두 지웠다는 것도 아주 작위적이고요. 이번 '천공호텔 단간론파'가 실제 초고교급 인사들을 섭외해 촬영된다는 것도... 그런 억지스런 이야기를 모두가 쉽게 믿는 것도 이상해...."


"무슨 말을 하려고.... 설마 시청자 대표들을 의심하려는 건 아니겠지? 분명히 말해두건대 '단간론파'는 진짜야. 한치 거짓도 없이 잘나가는 인기 방송이라고."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들도 속아넘어간 거라면?"


"뭐?"


"시청자 대표들, 방송국으로부터 초대장을 받고 쇼에 섭외되었다고 했죠. 보통 시청자 참여 인원을 그런 식으로 뽑는 일은 드물지 않나요? 기본적으로 지원서를 받고 그중에서 추첨이나 면접을 통해 뽑는 게 보통이죠."


"...그거야 물론,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천공호텔 단간론파'가 진짜를 사칭하는 가짜 방송일 가능성은 없나요?"


"......그건."



갑작스레 날아든 질문에 카라스야마 씨는 볼을 긁적였습니다.

숨길 수 없는 당혹감.

'천공호텔 단간론파'가 가짜일 수도 있다?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가상현실'이라는 무지막지한 기술력을 아무나 가지고 있는 건 아니야. 게다가 이 방송이 처음부터 사기였다면 피에로 녀석들의 테러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어진다고."


"'피에로와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처음부터 한 패'라는 가설도 있겠죠. 피에로라는 거짓된 적을 만들어서 화살을 돌리는 방법을 취한 걸 수도."


"......그런 것치곤 너무 요란한데. 증명할 방법 있어?"


"...증명이라기엔 애매하지만, 전부터 생각해뒀던 의문점이 하나 있어요."



대화가 핵심으로 다가가자 저는 조금 긴장하면서 뒷짐을 지고 말을 꺼냈습니다.



"당신, '단간론파'에는 반드시 흑막이 존재한다고 했죠? 가상현실 속에 반드시 피에로와 한패인 흑막이 존재할 거라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아아. 그랬지. 보통은 방송국의 프로듀서가 흑막 역을 맡는 게 일반적이지만...."


"바로 그거에요."


"?"


"생각해보세요, 카라스야마 씨. '천공호텔 단간론파'가 가짜 방송이 아니라면, 우리들 사이에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요. 피에로와 결탁한 흑막이 아닌 방송국에서 준비한 본래의 흑막이. 방송국의 프로듀서가."


"......!"


"수상하지 않나요? 방송이 이 지경이 됐는데 아직까지 '방송국의 흑막'이 정체를 드러낼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게? 흑막인걸 끝까지 숨겨서 시청자들의 칭찬이라도 받을 생각인가요?"


"확실히... 그건 어색한데. 방송국 측 사람이라면 방송국의 테러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잖아. 방송사 사람이라는 걸 밝히면 신원 보장도 확실하게 될 테고."


"맞아요. 그래서 제 생각은...."




-




"'천공호텔 단간론파'의 흑막을 수소문해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방송국과 테러리스트들은 한 패, 라는 건가?"




-



아차.

은밀한 이야기를 너무 열린 공간에서 한 걸까요.

갑작스레 나타난 제 3의 목소리에 흠칫 고개를 돌리자, 으슥한 나무 그늘 아래서 담배 연기를 태우는 그녀가 있었습니다.

얼굴의 절반을 가린 초고교급 르포기자, 시가라토 유즈가.

그리고 그녀는,




"축하해. 너희들이 찾고 싶어하는 그 사람, 너희들의 눈 앞에 있어. 내가 바로 '천공호텔 단간론파'의 흑막...이 되었어야 할 사람이니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정체를 발설해버린 것이었습니다.



"다시 인사할게. 초고교급 PD, 시가라토 유즈야."


-



-





A]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 카미나기 한나 ???
A] <시청자 대표> 카라스야마 류이치

B] <초고교급 보디가드> 아자부 이토리
B] <초고교급 갬블러> 아야키치 슌

C] <초고교급 JK???> 쇼코라 치에
C] <초고교급 ???> 유키야마 카무이

D] <초고교급 상담부원> 타키모리 유미코 DEAD
D] <초고교급 현악부원> 토미하레 소루 DEAD

E] <시청자 대표> 레이몬 하루히 DEAD
E] <초고교급 펜싱선수> 키리누키 켄마 DEAD

F] <초고교급 실험부원> 타노 나타타
F] <초고교급 대장장이> 타치바나 츠나요시

G] <초고교급 랭킹메이커> 이나모리 쿠키
G] <초고교급 사서> 이시미네 칸

H] <초고교급 동화작가> 아리스 윈터우즈
H] <시청자 대표> 후네즈 신지

I] <시청자 대표> 시무라 카리나 DEAD
I] <초고교급 변호사>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J] <초고교급 PD> 시가라토 유즈
J] <초고교급 연극배우> 키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