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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발언자의 신원을 표기하기 위해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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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 ch.3 일상편

<빨간 망토, 늑대 그리고 사냥꾼>



-



"다시 인사할게. 초고교급 PD, 시가라토 유즈야."



"어...."




그야말로 불시의 기습.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할 말을 잃은 저와 카라스 씨를 한쪽 눈으로 흘겨보던 시가라토 양은 이윽고 몸을 돌려 숲 속을 향했습니다.


"따라와. 이곳은 듣는 귀가 많아."


머뭇거릴 틈도 없이 숲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그녀의 뒤를 다급히 뒤쫓았습니다.

쌀알이 빼곡하게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인 고령의 나무들은 이파리 사이로 한 뼘 정도의 햇빛만 겨우 남겨두었을 뿐이라, 카라스 씨와 둘이서 탐색했을 때보다 훨씬 어둑하고 음침한 길목이 꺼림칙했습니다.

두꺼운 나무뿌리가 얽혀서 발을 옭아매고 잔풀은 가시가 잔뜩 돋아나있는.

아까의 길이 뻐꾸기와 토끼의 숲이라면, 이곳은 마치 까마귀와 늑대의....

같은 숲 속에서 길을 다르게 든 것 뿐인데 이런 차이가 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죠.



"...길이 험한데도 잘 걸으시네. 익숙한 맵이라서 그런 건가? '초고교급 PD' 씨?"


"PD라곤 해도 맵의 제작에는 관여한 적 없을 뿐더러, 어촌과 이번 맵은 테러범들이 제멋대로 크래킹한 미지의 공간이야. 카라스야마 류이치, 떠보는 거라면 관둬. 너희를 속일 생각 따윈 없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너 지금 무지막지하게 수상한 거 알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건들건들, 얼굴은 생긋생긋.

평소같았다면 한 소리 해주고 싶은 태도지만 지금만큼은 하고싶은대로 하게 둬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음침하게 대화를 엿듣다가 난데없이 자신이 그 '방송국의 흑막'이라니. 초등학생도 안 믿어요, 그런 말. 가짜 행세를 하고싶은 진짜 흑막일거란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왜지?"


"방송국의 흑막을 찾아내겠다는 방안을 들고 나온 건 그쪽의 아가씨야. 이제와서 믿을 수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어도 되려 당황스러울 뿐인걸. 그리고 이쪽도 꽤나 궁지에 몰려있는 처지라....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면 곤란해."



궁지에 몰려있다, 도움이 필요하다....

어딘가 초조해보이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시가라토 유즈가 멈춰선 건 어느 작은 통나무 오두막의 앞이었습니다.

주변을 살짝 살피곤 조심스레 발을 딛는 그녀를 따라 오두막에 들어가자 생각보다 밝고 깨끗한 내부가 손님을 반겨주었습니다.

아늑한 안락의자에 불이 붙진 않았지만 꽤 그럴싸해 보이는 벽난로, 일인용 침대까지.

'빨간 망토'에 나오는 할머니의 집이 아마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요.



"여기라면 괜찮겠지.... 자, 대화를 나눠보자고. 태그 A 여러분."


각자 적당히 앉을만한 곳을 골라잡았습니다. 시가라토 양의 인사 뒤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를 뻔한 걸 겨우 카라스 씨가 입을 뗄 수 있었습니다.


"'초고교급 행운'의 재능을 가진 '단간론파'의 캐릭터는, 누구지?"

"카라스야마 씨...? 무슨 그런 질문을?"

"다물어, 최소한의 확인 작업이니까."


"......'나에기 마코토'와 '코마에다 나기토'. 각각 키보가미네 학원의 78기, 77기생이지. 요술에 가까운 코마에다 나기토에 비해 나에기 마코토는 일반인에 가깝지만...."

"마이조노 사야카의 다잉 메세지는?"

"11037, 뒤집어서 LEON."

"으음....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몇 회차 째의 방송이지?"

"그거야 당연히 오ㅅ.... 쯧. 이봐, 그만하지. 당신 파트너가 우릴 외계인 취급하고 있으니까. 이 정도면 확인은 됐을텐데."



영문 모를 질문을 하는 카라스 씨나 그 질문에 심각하게 응하는 시가라토 양이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처럼 느껴져 살짝 우스웠습니다.

대답을 들은 카라스 씨는 만족스럽진 않아도 이 정도면 넘어가자고 생각한 건지 한층 경계를 푼 듯 했습니다.


"일단은, 네 말이 사실이란 걸 전제하고 생각해보지. 착각하지 마, 믿는다는 뜻은 아니니까. 다만 대화가 헛도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뿐이야."


시가라토 양은 상관없다는 듯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어째서 그걸 이제 와서 밝힐 생각이 든 거지?"


"그야.... 먼저 밝힐 이유가 없었으니까."


"밝힐 이유가 없어?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방송국 인사에게 행동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곧바로 수습을 위해 두 발 벗고 나서도 모자랄 판에...."


"바보같은 소릴 지꺼리긴.... 마피아 게임에서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스스로 경찰임을 밝히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어? 다짜고짜 '내가 방송국의 PD니 믿고 따라달라'고 해봤자 의심의 눈초리밖에 더 샀을까?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날카로워져있을텐데.... 반대로 우리 중에 숨어있는 테러범의 끄나풀에겐 노리기 좋은 표적이 되겠지. 숨어있던 방송국 마지막 희망마저 절망적으로 사살.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진 않았어."


"그렇다면 어째서 이제 와서 정체를 밝힐 생각이 든 거죠?"


이번엔 제가 물었습니다.


"계속 꽁무니 빼고 숨어있었으면 될 텐데."


"무언가 특별한 계기가 있는 건 아니야. 흑막의 단서를 잡았다던가 하는 희소식이라도 기대한 거라면 아쉽게 됐군. 난 그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야. 누군가 내 존재를, 방송국 인원의 존재를 알아채주지 않을까... 하며.

말했다시피 자진해서 눈에 띄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밤 시간' 동안 마피아에게 살해당하던가, '낮 시간'에 선동당한 시민들에게 처형당하던가 둘 중 하나지. 하지만 누군가 먼저 내 존재를 알아채준다면 언제까지고 숨어있기만 할 이유도 없잖아? 오히려 나중에 오해를 살 수도 있어.... 그런 불상사만큼은 피해야지.

그리고 실은,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나를 찾아낸 사람이라면 그 사람만큼은 흑막이 아닐거라는 믿음도 조금 있고."


"...그렇군요. 그렇다면 '궁지에 몰렸다'라는 건 무슨 의미죠?"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천공호텔 단간론파'의 담당 PD가 눈앞에 있다고. 듣고싶은 정보가 많을텐데?"


"많다마다."


카라스야마 씨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짜증스럽게 대꾸했습니다.


"어째서 우리였지?"


"...시청자 대표 말이야?"


"그래. 어째서 우리 네 사람이 시청자 대표로 등록된 거야? 그 많고 많은 시청자들 중에서 어째서 우리에게 초대장이 날아온 거냐고."


"일단 딱 잘라 말해두겠는데, '네가 우릴 끌어들여서 동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개소릴 할 거라면 집어치워. 떠드는 시간이 아깝다."


"...그런 게 아니야. 그냥 궁금한 걸 해결하려는 것 뿐...."



그렇게 말하는 카라스 씨의 입꼬리가 살짝 일그러졌습니다.



"...좋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그것부터 정정해주도록 할까. 너희들 시청자 대표는 절대로 우리 측에서 먼저 섭외한 게 아니야. 오히려 그쪽에서 먼저 참가를 원한다며 접근해왔지."

"뭐라고?"

"'천공호텔 단간론파'의 제작 진행으로 한창 바쁘던 와중, 방송국으로 쪽지 하나가 날아들었지.

'어마어마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걸 알고있으니, 우리 측 4인을 시청자 대표 자격으로 참가시켜라. 단간론파에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거부할 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기대하도록....'

너희들, 사회에서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는 범죄 크루였던 모양이야? 쪽지를 받아든 국장님은 한참을 고민하다 내게 상담을 요청했고 난 쿨하게 수락하라고 했지. 이슈거리가 제발로 뛰어들어준다면 우리야 좋으니까."


"하하. 개소리 집어치시지. 안되겠어, 카미나기. 역시 이 녀석이 흑막이야. 죽여버리자."

"그건 안 돼요, 카라스야마 씨. 설령 흑막이 맞더라도 죽이지는 않아요."

"뭐라고?"


"이봐, 이봐. 그쪽이 궁금해한 팩트를 말해주는 것 뿐이야.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내 쪽이 더 말이 되잖아? 왜 너희같은 보잘 것 없는 무법자 나부랭이들을 방송국이 먼저 나서서 섭외해야하지? 그것도 위대한 초고교급들이 한 곳에 모이는 역사적인 자리에? 그쪽의 요구를 수용해준 것만으로 감사하게 여겨. 엄한 데 신경질 부리지 말고."


"......!!"


"만약 몰랐다면 방송국에 참가를 요구한 그쪽의 '누군가'가 그 사실을 숨겼다는 의미겠지. 시무라 카리나와 레이몬 하루히는 죽었으니 예외로 둬도 후네즈 신지라면 어떨까? 아아, 혹시 모르지. 시침 뚝 떼는 네가 동료들을 모조리 위험에 빠뜨린 그 장본인일지도."


"개소리...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건 알아서 생각해, 이 얼간아."



알아서 생각해, 라곤 해도 그 말로써 시가라토 양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꽤 명백했습니다.

시청자 대표가 의심스럽다.

카라스야마 씨를 파트너로 둔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후네즈 신지의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이 떠올랐습니다만, 적어도 카라스 씨는 그 사실을 인정할 생각이 없어보였습니다.

아니, 카라스야마 씨마저도, 저는 믿을 수 있는 걸까요.

이젠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화제를 돌리죠. 시가라토 양, 그렇담 당신의 초고교급 기자로서의 프로필은 모조리 거짓이라도 생각해도 무방하겠죠?"


"...글쎄. 모조리까진 아닐지도 모르지."


"그런가요.... 자세한 건 묻지 않도록 하죠. 그리고 하나 더.

당신, 다른 플레이어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죠? 이를테면 NG 행동, 출신 배경, 참가 동기 등에 대해서...."

"적어도 시청자들보다는 더 잘 알고 있지. 하지만 NG 행동의 내용만큼은 나도 몰라. 형평성을 위해서라나 뭐라나."



천공호텔 단간론파의 PD조차 NG 행동을 모른다?

...그건 다행이네요.



"그렇담 참가자 중에서 수상한 이력을 가진 사람은? 과거가 불확실하다던가, 특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던가. 저와 슌, 그리고 이토리 양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려주세요. 유키야마 카무이, 그 사람은 대체 뭐죠? 아리스 양은 또...."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받고픈데....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최대한 간추려서 설명해주지. '천공호텔 단간론파'의 대대적인 캐스팅 작업에 대해 말야.

카미나기 한나, 너는 초고교급들 중에서도 가장 명석한 그룹에 속하니 대략 짐작하고 있었을 거라 믿지만, 너희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시대와 지금 현대의 사이에는 꽤나 오랜 세월의 격차가 있을 거야."


"그건...."



시가라토 양의 말에 스치듯 지나가는 몇 개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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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미네 칸: "윈터우즈 동화를 모른다…? 설마, 동화책이라고 해서 무시하고 계신 겁니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는데요. 자격지심은 좋지 않아요."

이시미네 칸: "카미나기 씨. 그런데… 대체 어떻게 희대의 대작가 윈터우즈를 모를 수 있죠? 여기 상식이 부족해보이는 꼬맹이와 동화랑은 담을 쌓았을 것 같은 후네즈 씨도 윈터우즈 동화라고 하면 바로 바로 알아들었습니다만."

"하지만 정말 모르는걸요. 해○포터 시리즈 정도는 알지만."

이시미네 칸: "해○포터라니, 언제적 고전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과거에서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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슌: "들으면 뭐 어때? …다른 녀석들도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가는 게, 아무리 살아온 환경이 달라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유머 센스가 다를 수 있는 건가…? 아니면 한나, 너랑 내가 이상한 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믿지 못하는 건 곤란해요. 저와 슌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런 걸로 가자고요. 우린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에요. 알겠죠? 지금은 여왕님이 주최한 다과회에 참석한 거고, 주민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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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양, 쿠키 양. 이런 데서 자면 키 안 커요."

이나모리 쿠키: "zzz…? 흐아아암, 남의 컴플렉스를 건드리면 못 써요, 할머니…. 딱히 컴플렉스도 아니지마안."

"후후, 아무리 백발이라지만 할머니라니 상처라구요. 쿠키 양."

이나모리 쿠키: "…역시 말투도 할머니같아. 옛날사람 답다면 옛날사람 답네… 흐아아아아암."

"…이나모리 양, 몇 살?"

이나모리 쿠키: "1X 살. 만 나이."

"저는 1@살인데요. 만 나이로. 잠깐만, 오히려 이나모리 양이 나이가 더 많아…?"

이나모리 쿠키: "흐아암…. 어쨌든 할머니는 할머니야. 할머니랑 그 보디가드, 그리고 할머니 남자친구. 셋 다 옛날 사람이라구…. 흐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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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도 다수, 무언가 대화가 엇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던 경우가 분명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타임슬립이나 시대 전이 따위를 예상했던 건 아니지만, 시가라토 양의 말이 아주 놀랍게만 느껴지지 않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역시 저와 슌은 과거에서 온 사람인건가요?"


"과거에서 온 사람이라. 타임슬립 판타지 시대물 같은 용어를 쓰네. '옛날 사람' 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


"결론부터 말하자면 YES지만 너희 뿐만이 아냐. 시청자 대표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들이 각자 다른 시기에 태어난 초고교급들이니까. 물론 너희가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편에 속하는 건 맞지만...."


시가라토 양은 다 피운 담배를 대충 비벼서 끄며 대략적인 연령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슌, 이토리 양, 거기에 타치바나 츠나요시 군이 1세대.


그로부터 10년 정도 지난 토미하레 소루와 키리누키 켄마가 2세대.


아리스 윈터우즈,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타노 나타타, 3세대.


타키모리 유미코와 쇼코라 치에, 이나모리 쿠키, 이시미네 칸이 4세대.


마지막으로 키쇼 군과 시가라토 양이 가장 시청자 대표에 가까운 나이대라고.

문제의 유키야마 카무이는, 알 수 없음.



"한 사람 한 사람이 10년에 한 번 날까말까 한 분야의 천재들이지. 초고교급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건 그런 의미야. 조금 뛰어난 수재들을 섭외하는 것 정도로는 이루어지지 않아."

"끄응.... 아무리 예감했다곤 해도 파격적인 설정이라 머리가 아프네요. 그렇다면 저는 기억을 오락가락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 인건가요?! 그것만은 정말로 싫은데요!"

"카미나기, 그런 걱정은 접어둬도 돼. 적어도 내가 본 너희들의 모습은 10대의 젊은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는 질문은 받지 않겠어. 오히려 내가 묻고싶은 일이니까. 내가 확언할 수 있는 건 너희들 모두 고등학생 시절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틀림없이 그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들이라는 거지. 잘 만들어진 대타라는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나름대로의 확인 절차가 있었으니 확실해."

"확인 절차?"

"너희 초고교급들은 하나같이 개성넘치는 녀석들이지만, 확실한 공통점이 있어. 그건 모두 얼굴에 특별한 표식이 있으며, 고등학생의 나이에 '행방불명', 즉 실종된 사람들이라는 거지."

"...!"



카지노, 샹들리에, 테러리스트....



"시대를 풍미한 천재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그 천재들의 실종, 납치 사건.... 그래, 맞아. 천공호텔 단간론파의 등장인물들은 미제 실종 사건의 주인공들이야. 세간의 주목을 받다 감쪽같이 사라져 역사에서 감춰진 천재들이 수십 년 만에 사라졌을 때의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이것만큼 이슈가 될 만한 소재도 드물잖아?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그런 기획이야."


"......."



믿을 수 없다...라는 표현은 너무 진부하겠죠.

믿기로 했다, 라는 말이 오히려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눈앞에서 줄줄줄 쏟아지는 정보의 샘이 너무 동화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워서, 오히려 억지로 믿어야겠다고 다짐을 다지지 않으면 혼절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실종된 사람들을 방송국은 무슨 수로 찾아낸 거죠?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 아닌가요?"

"글쎄, '단간론파' 시청자들의 제보력을 얕보면 곤란한데."

"제보라고요?"

"그래. 실종된 초고교급에 대한 자료 자체는 이미 취재자료로 가지고 있었어. '단간론파'의 PD로 부임하기 전에 맡았던 프로그램에서 미스테리 소재가 필요했거든.

'붉은 발의 아리스 님' 괴담. 카라스야마 류이치, 너라면 들어봤겠지? 그 도시전설에서 차츰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그렇게 어렵지도 않더군. 얼굴에 표식이 생긴 천재들이 사라진 사건.... 그때 난 최선을 다해 사건을 쫓았지만 결국 진실에 닿는 데는 실패했어. 딱 알아낸 것까지만 방송에 내보내고 치워버렸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단간론파의 방영이 한창이었을 무렵, 익명의 시청자들에게서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실종된 초고교급들의 목격 제보...군요?"


"그래. 그 뒤는 일사천리지. 모든 정보력과 시청자 제보를 동원해 탐색에 나선 우리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있던 초고교급들을 찾아내는데 성공했고, 결국 천공호텔 단간론파라는 희대의 기획을 이루어낸거야.

뭐.... 현실은 알다시피 시궁창이지만 말야."


"......과거에 초고교급이었던 사람들이 외모만은 그대로다? 무슨 늙지 않는 뱀파이어라도 되나요?"


"글쎄. 그것보단 훨씬 그럴싸한 가설이 있지."


시가라토 양은 품에서 새 담배갑을 꺼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쏘았습니다.


"'냉동인간'...이라면 어때?"

"냉동인간?"

"그래. 옛날 사람인 네겐 터무니없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현대의 기술력으론 이미 이상할 게 없는 일이야. 보편화까진 아니어도 충분한 기술력을 갖춘 시설이 이미 전세계에 몇 곳이나 있지."

"가상현실 살인게임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기술을 의심하진 않아요. 그렇다면... 실종된 초고교급들은 사실 콜드슬립에 들어간 채 숨어있었고, 수 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나서 단간론파라는 쇼가 방영되자 일제히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을쎄요.... 너무 형편 좋은 이야기가 아닌지."

"반대라면 어때?"

"반대라면...?"

"이를테면, 콜드슬립 기술을 보유한 누군가가 수십년 전부터 계획적으로 초고교급 학생들을 '수집'했다. 실종 사건은 납치 사건이었고, 모종의 연유로 자유를 되찾은 초고교급 학생들이 다시 세상에 나와 활동하기 시작했다면. 이건 좀 더 말이 되지 않을까?"

"......."

"그리고... 이건 조금 억측이지만."


어느덧 두 개비의 담배를 더 태운 시가라토 양은 재를 탁탁 털며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이 살인게임의 진정한 흑막에는 초고교급들을 수집한 그 녀석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 생각해."

"...!"

"목적은 아마도 잃어버린 초고교급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혹은 반대로 이 살인게임 자체가 목적이었을 수도 있겠지.... 이봐? 듣고 있어?"




누군가가 세기에 걸쳐 초고교급을 수집했다.

그 누군가가 이 살인게임의 흑막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누가? 대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



"미안하지만 이미 준비는 끝났다, 아자부 이토리. 비겁한 수를 써서라도 임무는 완수해야하니까.
모든 초고교급 재능들은…. 내가 데려간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이 씨ㅂ…."

"그리고 반드시 기억해라. '초고교급 사냥꾼을 조심해라'라고."


-



"......!"


"뭐야, 그 표정은? 뭔가 집히는 부분이 있는 건가?"


"이토리 양이 옳았어요...!"


"하...?"


"저와 슌을 습격한 테러범,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모든 초고교급은 내가 데려간다. 초고교급 사냥꾼을 조심해라...'. 그 사람이 분명해요. 초고교급들을 수집한 사람. 초고교급 사냥꾼이란 건 초고교급을 사냥하는 사람이란 뜻이었던 거죠!"


"...!"


'초고교급 사냥꾼'. 그 단어에 시가라토 양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반응하며 움찔거렸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제가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요. 시가라토 양, 유키야마 카무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죠? 어째서 얼굴에 표식이 없는 그 사람이 초고교급으로 캐스팅 된 거에요? 베일에 감춰져있는 그 사람의 재능은 뭐죠?"

"그건... 나도 몰라. 유키야마만큼은 내가 섭외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어. '천공호텔 단간론파'의 작가진이 방송국 흑막이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라며 꽁꽁 감췄으니까. 그를 의심하는 거야?"

"현재까지 '초고교급 사냥꾼'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유키야마 군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어요. 시가라토 양은 여전히 시청자 대표를 의심하는 건가요?"

"그래. 억지로 참가를 요구한 범죄자들을 두고 방송국이 준비한 참가자를 의심할 수는 없어. 난 어디까지나 초고교급 PD니까. 유키야마 카무이를 의심할 합당한 증거가 없다면...."

"확인할 방법이 있어요."

"?'



-


다소 미래적인 디자인의 기계장치가 칼날에 꿰뚫려 있었고 그건 범인의 오른 어깨 부위였습니다. 점점 형체가 드러나 온몸에 갖가지 알아보기도 어려운 기계장치를 장착한 검은 인간의 형태가 이루어졌습니다.

기다란 소총을 들고 얼굴은 알아보기 어렵게 마스크를 찬 모습이 픽션 속 특수부대의 전투원을 연상시켰습니다. 칼날을 타고 흐르는 선혈이 아니었다면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초고교급 사냥꾼. 그 사람은 분명 오른쪽 어깨에 아자부 양이 나이프를 던져 생긴 흉터가 있을 거에요. 꽤 깊게 박힌 상처였으니 분명 흔적이 남았을 거라고요. 그걸 확인하면 돼요.

죄송하지만 시가라토 양이 처했다는 위기는 나중에 듣도록 할게요. 지금은 우선 유키야마 카무이를.... 어라."



한창 이야기에 집중해있던 저는 자리를 뜨기 전에 주위를 살피다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함께 이야길 듣던 카라스야마 류이치가 언제부턴지 감쪽같이 사라진 겁니다.



"카라스야마 씨? 카라스야마 씨?"

"...내버려 둬. 아마 내가 한 말이 신경쓰여서 후네즈 신지를 쫓아간 거겠지. 시청자 대표 중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 의심을 살 만한 건 그 녀석 정도니까."


시가라토 양은 마지막 담뱃재를 툭툭 털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미덥잖지만 이번만큼은 어울려주지. 가자. 할머니의 탈을 쓴 늑대를 잡으러."



-




-



"사실이야?"


"후훗, 다짜고짜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류 쨩, 어디 아파? 안색이 끔찍하잖아♤."



사다리 위에서 대들보에 무언가 매다는 작업을 하던 신지가 싱긋 내려다보며 말했다. 와이어인가. 살인에 쓰일 장치를 준비하는 거겠지.

이곳은 '빨간모자의 집'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면 도착할 수 있는 '마녀의 집'.

뜨겁게 타오르는 화로, 찾아오기 쉽게 길목마다 떨어져있는 돌조각. 알기 쉽다. '헨젤과 그레텔'이다.

신지는 이곳을 살인의 무대로 낙점한 건가.



"여러 번 묻지 않을게. 우리들을 이 살인게임에 끌어들인 게 너냐, 신지?"

"하핫, 정말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어디서 뭘 듣고 와서 그러는 건지. 엉뚱해~ 물론 그런 점이 매력적인 거지만."

"아니라면.... 그걸로 됐어."


그걸로 되지 않았다.

대답하면서도 스스로를 부정한다. '나'는 이 녀석을, 친구인 후네즈 신지를 의심하고 있다.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살인을 준비하고, 아무렇지 않게 동조를 요구하는 그에게....

'나'는 정신없이 휘둘리고 있다. 사악한 마법사에게 조종당하는 피노키오처럼.


"흐흥. 살인 준비라는 건 두근거리네. 여지껏 저지른 그 어떤 범죄보다 더 위험하고 짜릿할 거란 예감이 들어. 안 그래, 류 짱?"

"......아아, 그렇지. 언젠가 한 번쯤, 이라고 누구나 생각은 해 보잖아? 이번이 그 기회일지도 모르지...."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류 쨩, 도시의 수돗물에 형광색 식용 색소를 풀었을 때 기억 나?"

"아아. 그거. 온 도시의 수도꼭지에서 형광 핑크색 물이 줄줄줄 샐 때는 볼 만했지."

"볼 만 한 수준이 아니었지. 색깔만 특이할 뿐 신체에는 아무런 유해요소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거품을 물고, 샤워를 하다 형광색 물이 나와 기절한 사람도 있고, 그 물을 마시면 즉사하느니, 아직도 독성이 남아있니 뭐니 하는 괴담이 돌아서 수도관이 복구된 뒤에도 길게는 몇 달 동안이나 사람들이 생수를 사 마셨잖아."

"그랬던가.... 별로 유쾌한 기억은 아니네."

"그거, 류 짱의 아이디어였다며?"

"......."

"아아, 모르는 척 하긴. 나는 그 사건에 반해서 우리 조직에 들어온 거였다고? 아니, 류 짱한테 반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라나?"



녀석이 조직에 들어온 계기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 무해한 악의. 거짓에 대한 한없이 새하얀 해석. 반해버렸어, 정말로 사랑에 빠졌다고. 아아. 이런 장난을 생각하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피가 돌아서 단 하루도 진정하지 못했어."

"그만해, 신지. 난 하루히를 좋아했어. 그걸 모르는 건 아니잖아."

"알아, 알아. 그 기집애.... 그런데 있지, 류 짱. 어쩌다 그렇게 식어버린 거야?"

"뭐...?"


녀석의 목소리가 한 순간에 얼어붙어서, 그 온도의 편차에 날카롭게 찔려버린 신경이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내가 매일 밤 꿈꾸던 그 사람이... 선망의 대상이, 사랑하는 그 이가, 어쩌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고 모든 일에 지쳐버린 듯 자포자기하게 된 걸까.... 난 도무지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궁금했어. 무엇이 너를 꺼뜨린 건지, 어떻게 하면 널 다시 타오르게 할 수 있을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꺼진 불을 다시 지피고 싶었어.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다시 보고싶었다고."


"미쳤냐...?"


"그래서 선택한 거야. '천공호텔 단간론파'를. 카라스야마 류이치의 두 번째 데뷔 무대로."



신지는 웃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마치 시원한 언덕가의 바람이라도 맞듯이.



"카 쨩과 히 쨩이 그렇게 된 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해. 그런데도 너는 그렇게 숨고, 소극적이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생각하는 걸 포기하지. 전력을 다하면 분명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텐데도."


"......."


"류 쨩. 이젠 알을 깨고 태어날 때야. 이건 '나'의 살인이 아니야. 준비는 끝났어. 이제 저지르기만 하면 돼. 트릭의 틀은 갖추어놨으니 네가 디테일을 짜는 거야. 세상에게 보여줘.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까마귀 따위가 아니라 공작새라는 걸. 그저 잠시 기름을 뒤집어 썼을 뿐이라는 걸...!"


"이 미친 새끼!"



인내심의 한계는 이미 넘어섰다.

그저 지나치게 흥분한 몸이 제때에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그대로 사다리를 발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균형을 잃은 신지가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고, '나'는 녀석이 떨어뜨린 망치를 홀린 듯이 쥐어들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이런 게, 살인자의 감각이란 건가.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나'는 역시 그때 카미나기를 찔러죽일 생각따윈 추호도 갖지 않았었다고.

바닥에 쓰러지고도 헤실헤실 웃는 저 남자의 얼굴을 박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찰 만큼의 살의가 아니면, 살인 같은 건 절대로 저지를 수 없다는 걸 체감했다.



퍽.


둔탁한 소리가 났고, 피가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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