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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무수정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천공호텔 단간론파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발언자의 신원을 표기하기 위해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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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 ch.1 비일상편
<감이 좋아서 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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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쿠마: "키리누키 군의 말대로 이젠 작별의 시간입니다! 팔자 좋게 하고픈 말도 다 쏟아낸 것 같고, 더는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은 것 같으니 슬슬 여러분을 기다리는 처형대를 가동시켜도 되겠지요?

초고교급 펜싱선수 키리누키 켄마, 그리고 오컬트를 사랑하는 시청자 대표 레이몬 하루히 양을 위해 스페셜한 벌칙을 준비했습니다!

자, 그러면 다같이 힘차게 가볼까요?


벌칙 타임!"










-





치지직… 치직… 치지지직….







-




모노쿠마: "……."

키리누키 켄마: "……."

레이몬 하루히: "……?"

모노쿠마: "……."

카미나기 한나: "……."

아야키치 슌: "……."

아자부 이토리: "……."

시가라토 유즈: "……?"

키쇼: "……??"

레이몬 하루히: "… 저기, 모노쿠마 씨? 우리 마음의 준비 다 끝났는데…. 벌칙… 시작하는 거 아니었어?"

모노쿠마: "……."




의아했습니다.

힘차게 벌칙 개시를 선언한 모노쿠마의 말과는 달리 학급재판장엔 먼지 한 톨 날릴만큼의 바람도 불지 않았습니다.

웅성대는 목소리들, 춤을 추다 전원이 나간 인형처럼 딱딱하고 굳어버린 모노쿠마.

돔의 중앙을 주시하던, 기대감에 흠뻑 젖은 시청자들의 눈빛도 한순간 얼어붙었다가 서서히 녹아들지만, 녹아버린 그것은 이미 본래의 뜨거운 열기를 잃어버린 식은 죽과도 같았습니다.

의아함은 곧 직감이라는 이름의 화학약품과 만나 불안함으로 변화하고, 불안함은 뜨거운 물에 빠진 드라이아이스처럼 새하얀 연기가 되어 스멀스멀 주위로 퍼져나갑니다.



"무언가…."



이윽고 쏟아지는 시청자들의 야유.

그 대부분은 방송사고를 예감하고 주최측을 욕하는 것이었으나, 수만 명의 한가운데에서 포화와 같은 욕설을 귀로 받아낸다는 건 어쩐지 마음에 망치질을 하는 듯이 기분 나쁜 체험이었습니다.

'아, 우리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고! 망할 할배들이!'라며 역으로 시청자에게 화를 내며 싸우는 쇼코라 양 외엔 모두가 침묵에 빠진 그때.

말 없이 지팡이에 두 손을 얹고 있던 키리누키 씨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키리누키 켄마: "…하루히 양, 지금 상황이?"

레이몬 하루히: "상황이랄 것도 없는데…. 그냥… 멈췄어. 모노쿠마도, 학급재판도…."

후네즈 신지: "무후훗,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나♧ 단간론파가 방송사고가 잦은 방송이긴 해도, 벌칙이 시작되기 직전에 오작동이 일어난 적은 없었는데. '벌칙'이라는 건 쇼의 하이라이트라구. 절대 사소한 NG라도 생겨선 안된단 말야. 무훗."

키리누키 켄마: "……흐음. 점점 어찌 된 영문인지. 한껏 각오를 다져놨더니…."


'단간론파'에 익숙한 시청자 대표들도 고개를 젓는 걸 보아하니 확실한 돌발상황이었습니다만, 마땅히 뾰족한 수도 없고, 누가 먼저 나서 '빨리 벌칙 주세요' 닥달하기도 애매하니 모두들 다시 입을 다물었습니…

……
……

다?



-


치지직… 치직… 치지지직….


삑.

-





"잠깐만요, 저 에구이사루…!"

키리누키 켄마: "……!"

아자부 이토리: "…! 이런 씨발!"

유키야마 카무이: "……!"

타치바나 츠나요시: "오, 오옷?!"



불길한 붉은 빛이 달처럼 모노쿠마를 비춥니다.

바로 알아챘습니다.

흑색의 살인거인, 그레이트 에구이사루가 움직인다는 걸.


미처 말을 마칠 시간도 없이 검고 거대한 것이 학급재판장 정중앙에 운석처럼 내리꽂혔습니다. 바위 같기도 하고, 건물 같기도 한 그것.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의 금속 주먹이.

작렬.

금속 재질의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와 귀를 찢는 충격파.

옥상이 통째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움찔 몸을 숙였지만, 채 바닥에 주저앉기도 전에 누군가가 몸을 확 낚아채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느새 이토리 양의 왼쪽 옆구리에 끼어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반대쪽 옆구리에 붙들려있던 슌은 이미 눈이 뒤집혀있었고, 두 명을 짊어지고도 중력을 무시하는 몸놀림으로 공중에 붕 떠오른 아자부 양은 난처한 얼굴로 박살이 난 학급재판장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수 미터 높이의 조명대 위에 사뿐하게 착지한 아자부 양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댔습니다.



아자부 이토리: "이런 씨발, 다 뒤진 거 아냐…?!"

"…아니에요! 저기!"

아자부 이토리: "뭐?"


그야말로 작은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거꾸로 뒤집혀버린 학급재판장.

산산히 부서진 유리와 콘크리트 파편들에 휘어진 철골 가닥들이 얼기설기 엮여있었습니다.

피하지 못했다면 충분히 인명피해가 났을 법한 현장이지만….



유키야마 카무이: "……괜찮은가."

쇼코라 치에: "!…… 오라비?! 오, 오라비야말로…?"

타키모리 유미코 & 토미하레 소루: "…!"


콘크리트 벽을 오로지 한쪽 팔로 버티고 막아선 초고교급 ??? 유키야마 군.


키리누키 켄마: "요호홋, 다들 괜찮으신가요?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만."

레이몬 하루히: "하, 하아… 하아…. 하아…."

후네즈 신지: "오, 고마워. 검객 쨩 덕분에 살았네♤"

아리스 윈터우즈: "허… 흐어어… 무, 무지개색 총공격이다…!"


파편이 튀어 선글라스가 깨지고 이마에 피가 조금 흐르긴 했지만 지팡이를 휘둘러 피해를 막아낸 초고교급 펜싱선수 키리누키 씨.


타치바나 츠나요시: "읏짜잣… 차챳! 우랴아아아아앗!"

타노 나타타: "으하핫, 화이팅! 화이팅! 너 무쟈게 힘 쎄구나? 그럼 나 좀 살려줘! 아하핫! 아하하핫!"

이시미네 칸: "이, 이게 대체 무슨…. 잠탱이! 괜찮습니ㄲ…. 이런 와중에 졸지 마!"

이나모리 쿠키: "쿨…. 쿨…. 악! 아, 아파…."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미래적인 디자인의 건틀릿 같은 것을 착용하고 집채만한 기둥을 통째로 치워버리는 초고교급 대장장이 타치바나 군.


키쇼: "흐, 흐, 흐악…. 주, 죽을 뻔…."

시가라토 유즈: "…어차피 진짜 죽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위험하군요."


운 좋게 충돌이 닿지 않는 곳에 쓰러져있던 키쇼 군과 시가라토 양, 무라마사 군까지, 참가자들 중에서 방금의 주먹에 직•간접적인 상해를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했습니다.

너무 돌발적인 공격이었기에 깨닫지 못했지만,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의 공격은 직접적으로 키리누키 씨나 다른 학생들을 노리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 거인은 대체 무얼 위해 거체를 움직인 걸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닿았을 그때.


아자부 이토리: "뭐야, 저 녀석들…. 꽤 하잖아? 썬탠남이랑 건망증남…. 장님이 말한 뛰어난 세 사람이 저 녀석들인가?"

"아자부 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모노쿠마가…!"

아자부 이토리: "하?"


더 따질 것도 없었습니다.

그레이트 에구이사루가 서서히 주먹을 들어올리자, 그 아래에 프레스기에 깔린 듯 박살난 모노쿠마의 파편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한때 살인게임의 흑막, 천공호텔의 지배인을 자칭했던 그 곰은 도무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흑백의 무언가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벌칙을 진행시키려던 게임의 진행자를 간결한 폭력으로 삭제시켜버린 그레이트 에구이사루는 마치 자기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팔짱을 끼고 붉은 안광을 깜빡였습니다.


시가라토 유즈: "이게 대체 무슨… 무슨 일이지?"

키쇼: "어째서… 어째서 에구이사루가 진행자인 모노쿠마를 공격한 거죠? 에구이사루의 컨트롤권은 모노쿠마에게 있던 것 아닌가요?!"

시가라토 유즈: "나도 모르니까 캐묻지 마, 푼수!"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흐음. 그보단 쇼의 진행이…."

이시미네 칸: "젠장, 지금 그딴 게 중요합니까…! 파편이 더 떨어질 수 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갑작스런 에구이사루의 돌발행동에 시청자들의 반응은 이미 아비규환.

하지만 당장 눈앞에서 살인기계가 기동을 시작한 와중에 그쪽에 신경을 팔리는 것도 분명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키리누키 켄마: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벌칙'을 받는 건 잠시 미뤄야 할 것 같군요. 곧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이 플로어! 여러분, 다들 옥상 아래로!"

레이몬 하루히: "하, 하지만 어떻게 내려가라는 거야?! 여기 높이가…!"

타치바나 츠나요시: "내게 맡기시오! 초고교급 대장장이에게 인원 수송 정도는 가뿐하오!"

토미하레 소루: "나, 나부터! 나부터 데려가주세요, 선생!"

타키모리 유미코: "!! 이 비겁한!"

키리누키 켄마: "그럼 하루히 양은 제가 어떻게든 지킬테니, 타치바나 씨가 우선 다른 분들을…! 윽?!"

레이몬 하루히: "키리누키 군?! …윽! 크, 크윽…!"

"키리누키 씨!!!"


갑작스레 가슴팍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키리누키 씨와 그대로 풀썩 떨어지는 하루히 양.

샛노란색 불빛을 정신사납게 점등하는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의 시선이 그들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 "검정… 《벌칙》… 진행하겠다…."



이미 경직이 온 시체처럼 움찔움찔 경련하는 하루히 양 옆에 지팡이를 짚으며 겨우 의식을 유지하는 키리누키 씨.

키리누키 씨의 반파된 선글라스가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그걸 다시 주워들 여유도 그에겐 없어 보였습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그의 구겨진 얼굴. 꽉 깨문 입술 사이로는 피가 줄줄 흘러나옵니다.


한 줄기, 두 줄기, 그리고 이윽고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나오는 선혈의 파도.


지팡이를 짚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보지만 손가락 사이로 넘쳐나오는 붉은 액체는 그의 옷소매를 잔뜩 검게 적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팔자 좋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제 시선은 키리누키 씨의 선글라스 벗은 맨얼굴을 향했습니다.


선글라스 따위 어찌되든 좋았을 것처럼 기분좋게 찢어진 실눈.


고통을 숨기지 못하고 전신이 일그러져가는 와중에도 그의 눈매만큼은 선선한 상냥함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

키리누키 켄마: "……카미나기 아씨."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니, 물론 키리누키 씨는 장님이지만….

눈이 마주칠 리가, 그럴 가능성 따윈 전혀 없지만.

그렇지만 어째선지….

어째선지 영원한 작별을 짐작케하는……. 그런 눈맞춤이…….


키리누키 켄마: "…이 지팡ㅇ…."

-파직!

"……!"



스파크가 일었습니다. 발원지는 키리누키 씨와 하루히 양의 모노쿠마 뱅글.

마치 생명의 전구가 단선되어버린 것처럼, 스파크가 임과 동시에 하루히 양은 경련을 멈추었고 키리누키 씨는 입에서 검은 연기를 흘리며 무릎을 꿇은 자세로 축 늘어졌습니다.

죽음이라는 걸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만지지 알아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건 이렇게나 선명한 색채였던가.

마치 처음 죽음을 목격한 사람처럼, 저는 한참이나 그 순간 포착의 감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고작 가상현실 속의 게임오버에 불과했을지라도.



아자부 이토리: "뭐 해, 토끼녀! 멍때리고 있지 마! 다른 놈들은 벌써 건망증이랑 선탠남이 챙겨서 내려가고 있어! 우리도 내려간다!"

"……'이 지팡이를'."

아자부 이토리: "하아?!"

"키리누키 씨의 지팡이를 가져와야겠어요!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아자부 이토리: "무슨… 야, 야! 아, 씨발!"


제가 아자부 양을 뿌리치고 달려나가려 하자 아자부 양은 슌을 잠시 내팽겨치고 휙, 잔해 너머로 뛰어올라 순식간에 키리누키 씨의 지팡이는 물론 두 사람의 유해까지 챙겨 돌아왔습니다.


아자부 이토리: "느그 오빠 유품 챙겨왔다! 만족하냐 이 미친 멘쿠이년아! 이제 군말 말고 내려가!"


지팡이를 제게 꽉 쥐여주며 성난 눈빛으로 일갈한 아자부 양은 슌과 유해들의 처리를 제게 맡기고선 타치바나 군이 있는 쪽을 가리켰습니다.


"잠깐! 아자부 양은 어쩌려고요!"

아자부 이토리: "저 건담이 또 움직이잖아! 씨발, 누군가는 막아야 할 거 아냐!"

"하지만 지난번에 덤볐을 땐…."

아자부 이토리: "닥치고 가! 지난번처럼은 되지 않아! 내 의뢰주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내면 죽여버릴 줄 알아라!"


그 말을 남기고선 아자부 양은 또다시 주먹을 높게 치켜든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에게 뛰어들었습니다. 저는 듣는 사람도 없는 수긍을 하며 기절한 슌의 뺨을 때려 깨우고는 두 유해를 끌고 타치바나 군에게로 달려갔습니다.

타치바나 군은 천공 모노쿠마 호텔 외벽에 달려있는 간이 엘레베이터에 검은 케이블 가닥같은 걸 수없이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왕복 횟수를 줄이고 탑승 인원을 늘리기 위한 조치인 듯 했습니다.


타치바나 츠나요시: "이미 1/3 정도는 아래로 대피했소! 쇼코라 소녀는 유키야마 소년이 챙겨서 밧줄을 타고 내려갔고! 그런데… 그런데 보디가드 소녀는 어디에?"

"아자부 양은 에구이사루에 대항하고 있어요! 하지만 시간벌이밖엔 안 될 거에요!"

타치바나 츠나요시: "…!!! 젠장, 아자부는 안 돼!"

"…? 타치바나 군?"

타치바나 츠나요시: "잠시 기다리시오, 카미나기 소녀! 남은 인원들의 탑승을 도우시오! 탑승인원은 최대 여섯이고 푸른 버튼을 누르면 하강이오! 그럼 맡기겠소!"

"잠깐, 타치바나 군! 대체 뭘!"

타치바나 츠나요시: "그대를 신뢰한다는 뜻이오!"



타치바나 군이 케이블들을 기둥에 묶고 달려나가던 순간 아자부 양은 세 개의 칼날과 하나의 불기둥에게 노려지며 아슬아슬한 곡예 서커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스치면 죽음에 가까워질 게 분명한 다윗과 골리앗, 개미와 코끼리의 싸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떨리지 않는 몸놀림으로 검은 겉옷을 펄럭이며 이리저리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의 시선을 끄는 아자부 양을, 그리고 타치바나 군을, 저는 손에 땀을 쥐며 응원했습니다.


"여러분! 제 지시에 따라 승강기에 올라타세요! 순서를 지켜서, 밀지 마세요!"

아야키치 슌: "나, 나라도 먼저…."

"슌, 당신이라도 예외는 없어요!"

아야키치 슌: "쳇, 그렇겠지! 거기 바이올린! 안 들려? 순서 제대로 지키라니까!"


한편 전투에 합류한 타치바나 군은 한 가닥 남은 케이블을 과감하게도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의 다리에 묶고, 반대쪽 끝은 건틀릿으로 붙잡은 뒤 눈의 흰자가 덮을 만큼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겼습니다.

그레이트 에구이사루는 움찔, 눈 깜짝할 시간만큼 움직임을 제한당했지만 이내 힘이 달린 타치바나 군을 질질 끌어당겼습니다.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은 아자부 양의 발차기가 에구이사루의 어깨 관절부를 날카롭게 찔렀습니다.

스파크가 일며 아자부 양이 튕겨져 나왔지만, 에구이사루는 잠깐 휘청인 걸 제외하면 별다른 손상은 없어보였습니다.

타치바나 군의 건틀릿으로도, 아자부 양의 비상식적인 각력으로도 그레이트 에구이사루를 멈추는 건 무리.

위기이 빠진 타치바나 군에게 에구이사루의 주먹이 내리다 꽂히려던 그 순간, 출처불명의 검은 밧줄이 거인의 어깨를 휘감아 강하게 끌어당겼습니다.


유키야마 카무이: "……그레이트 에구이사루, 라고 했나."

아자부 이토리: "건망증…?!"

유키야마 카무이: "나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쩐지 네녀석만큼은 강하게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군!"


수십 미터는 될 법한 밧줄을 능숙한 솜씨로 다루는 예사롭지 않은 모습. 유키야마 군은 몇 번 더 엮은 밧줄을 휘어잡은 채 냅다 달려 호텔 옥상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끄덕없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휘청,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의 몸체가 균형을 잃고 뒤로 기울어졌습니다. 타치바나 군의 케이블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게 원인이었습니다.


타치바나 츠나요시: "보디가드 소녀! 마무리를 하시오!!"

아자부 이토리: "씨발, 알고있어!!!"


쓰러지는 것조차도 느린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의 기울어지는 몸체를 따라 달려 그 머리 부분에 도달한 아자부 양은 그걸 발판으로 한층 더 높게 밤하늘 위로 도약해 올라갔습니다.

공중에서 몇 바퀴나 회전하며 위력을 더하는 아자부 양.


아자부 이토리: "먹고 뒤져라!"


아름다운 회전 끝에 깔끔하게 에구이사루의 눈을 관통하며 작렬한 아자부 양의 내려꽂기.

그레이트 에구이사루는 완전히 균형에 대한 통제를 잃고, 결국 닿는 모든 것들을 박살내며 옥상 이래로 추락했습니다.

아자부 양은 발차기를 꽂은 반동으로 유연성있게 튕겨났고 착지하자마자 옥상 끄트머리 쪽으로 달려가 추락 현장을 내려다봤습니다.

타치바나 군이나 줄에 매달린 유키야마 군도, 승강기에 탑승하던 인원들도, 이미 지상으로 내려간 인원들도, 그리고 저와 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솟아오른 모래구름에 뒤덮인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의 실루엣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이지 않았습니다.

…갑작스런 벌칙의 중단, 에구이사루의 폭주, 모노쿠마의 분쇄, 아자부 양의 헌신, 타치바나 군과 유키야마 군의 활약….

어떻게 된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초고교급의 승리인가요?




…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키쇼: "해치웠나?!"

시가라토 유즈: "야 이 미친것아!"


키쇼 군이 '그 대사'를 뱉음과 동시에, 모래구름 속에서 다분히 기계적인 불빛이 점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샛노란빛의, 정신사나울 만큼 빠른 주기의….


아자부 이토리: "크, 크윽…!"

유키야마 카무이: "! ……우욱!"

타치바나 츠나요시: "크, 크아아아악!"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에게 최선을 다해 대적하던 괴물 3인방 모두 가슴을 움켜쥐며 나동그라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절망이라는 이름에 한없이 가까웠습니다.


아자부 이토리: "하, 하흑, 하윽… 이딴 거…!"

타치바나 츠나요시: "무, 무리하지 마시오! 크읍, 아마… 아마 녀석은 우릴 죽이려는 건 아닐 것이오…!"

아자부 이토리: "으윽… 뭐…?"

???: "느푸푸풋, 바로 그렇다네! 타치바나 군의 말이 백번 옳아!"

아자부 이토리: "…?!"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모래구름 속에서 들려왔습니다.

경박하기 그지없는 모노쿠마와는 달리, 두껍고 권위있으면서도 도무지 천박함을 숨길 수 없는 음색.

벌칙 실행을 안내하던 에구이사루의 기계적인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등골이 오싹오싹해지는, 허리 아래쪽이 서늘해지는,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그런 불길한 음성.


모래구름 속의 거대한 그림자가 삐걱거리며 제 모습을 되찾아갔습니다.

기체를 덮은 모래를 털어내며 출진하는 그레이트 에구이사루.

소름돋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때 모노쿠마가 그랬듯이 그 꼭대기에 우뚝 서 있어……

아니,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모노사메: "안녕하신가, 제군들! 이 몸은 우주해적 모노사메라고 하네! 자네들 전원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몸이기도 하니, 부디 예의를 다 해 대해주길 바라네! 느푸푸푸!"


몸의 절반은 새하얀, 나머지 절반은 새카맣게 물들인 모습의 상어.

스스로를 우주해적 모노사메라고 지칭한 그 생명체는, 시청자들의 고요한 침묵 속에서 돔이라는 이름의 어항에 강림했습니다.




-우주? 해적? 날아다니는 상어?

이것은 우주도 아니고, 대양의 밑바닥도 이니었으므로 이해할 수 없는 요소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한가지 직감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던 점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마음의 가장 깊은 뿌리로부터 샘솟아 올라오는 적대감.

'적'입니다. 저 생명체는 우리가 극복해야할 적입니다!

모노쿠마를 살해하고 그레이트 에구이사루를 조종해 우리를 습격한 저 녀석이야말로, 정말로 우리가 전심전력으로 미워해야할….


"윽?!"


순간 찌릿, 하고 머리를 찔러오는 기시감에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지만 다행히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한편 한쪽 발을 건방스럽게 난간에 걸치고 옥상 아래를 내려다보던 아자부 씨.

그녀는 심기가 불편한 걸 넘어 초조해지기 시작했는지 냅다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지만 모노사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어의 시선은 우릴 향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노사메의 관심사는 이 돔의 표면에 가득한 시청자들의 면면들.

그들은 화면 너머의 모노사메에게 한마음 한뜻으로 야유를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린아이도, 노인도, 병자도, 건강한 이도 모노사메를 비난하고 또 저주했습니다.



~뭐야, 저 반들반들한 어류는? 명실상부 <단간론파>의 마스코트는 뽀송뽀송하고 카와이☆한 모노쿠마 님이라고!

~마스코트 교체라면 나는 안 볼랜다

~제작진 감 잃었냐?

~아 씨발 안봐요 안봐

~뇌절

~우주해적 뭐시기? 하루사메?

~설마 키리하루 벌칙 벌써 끝난 거임? 죽은 것 같은데? 지금 장난함?

~아 하루히쨩 시체로 코스플레이 야스하고싶다
~ㄴ 미친새끼야
~ㄴ 우욱씹




모노사메: "풉, 푸흡, 느푸푸풉, 느푸푸푸푸! 느푸푸푸푸풋! 나원 참, 어이가 없어서는…."

시가라토 유즈:"……."

모노사메: "눈치가 느린 것도 적당히 하게나, 역겨운 시청자 제군들! 아직도 상황파악이 그렇게 안되나? 아니면 카메라 너머로 관망하느라 피부에 와닿지 않는 겐가? 느푸풋, 느푸푸풋! 하여간,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진 돼지들에게는 파악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군. 네놈들에겐 유아교육용 비디오가 딱 수준에 맞을텐데!"


신랄하게 시청자들을 비난한 모노사메는 몸을 징그럽게 팔딱거리며 지느러미를 허공에 휘둘러댔습니다. 상어라기보단 지네를 연상시키는 몸놀림이 인간의 본능적인 혐오감을 자극합니다.


모노사메: "뭐, 백번 떠드는 것보다 직접 한 번 보는 게 더 네놈들 대가리에 잘 맞겠군. 그레이트 에구이사루, 화면을!"


그레이트 에구이사루가 모노사메의 외침에 맞춰 그 육중한 손가락을 튕기자 돔 상공에 네모난 창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한 건장한 남성과 조그만 여성… 여성 쪽의 얼굴은 꽤 익숙합니다. 시청자 대표 시무라 카리나.

익숙한 구도의 방. 첨단 과학기업의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둥글둥글한 인테리어.

분명 학급재판이 막 시작했을 때 아자부 양의 요구로 시무라 카리나 양의 안위를 확인했던 그 장소에서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건강하고 쾌활한 웃음으로 모두를 안심시켰던 그녀의 모습은 화면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얼굴을 뒤덮은 시퍼런 피멍. 부러진 코뼈와 질질 새어나오는 코피. 터져버린 입술과 헝클어진 앞머리.

비린내가 화면 너머로 풍기는 듯이 적나라한 폭행의 흔적에 저는 그만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피에로 마스크: "오, 오! 나온다! 하핫, 나온다고! 하핫, 카리나 쨩. 화면 보고 웃어야지? 자, 스마일~"

시무라 카리나: "히, 히익… 사, 사알려주세에여…. 재성해여…. 머, 머든지 할 테니까아…. 쟤발…."


피에로 가면을 쓴 동그란 체형의 남자는 카리나 양의 짧은 머리채를 붙잡고 장난스럽게 앞뒤로 흔들었지만, 구타로 온 몸에 힘이 빠진 카리나 양에겐 그것마저 고문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공사장에서나 입을 것 같은 나시 티에 카고팬츠를 입은 남자는 허리춤에 찬 단검을 빼들어 카리나 양의 목에 가져다 댔습니다.

숨 쉬기가 어려웠습니다.


피에로 마스크: "자, 시청자 대표 카리나 쨩? 하핫.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하루히 쨩에게 전하는 통한의 사죄라던가? 응? 하핫. 하하핫."

시무라 카리나: "사, 사알려주새…."

피에로 마스크: "응, 안돼. 그럼 잘 가."

시무라 카리나: "아, 안ㄷ…."



푹. 찌직, 찍.

푹. 푹. 푹. 푹. 푹.

4 인치 정도 되어보이는 길이의 칼날이 그대로 카리나 양의 보드라운 피부를 꿰뚫어 갈랐습니다. 꿰뚫고 또 꿰뚫고 꿰뚫고 다시 꿰뚫었습니다.

피가 터져나왔습니다. 피가 비처럼 내리는 날에 댐을 방류한 것처럼 그저 붉은색이 또 터지고 터져나왔습니다.

커다란 구멍이 뚫린 사람의 육신에선 꽤나 비현실적인 소리가 났습니다. 꾸르륵, 꾸륵. 인체라기보단 찌그러진 생수통에서나 날 법한 소리라고, 순간 그렇게 생각해버렸습니다.

피에로 마스크가 머리채를 놓자 생의 연료를 잃은 껍데기는 힘없이 널브러져 화면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가상현실 속의 무대 위에서 식칼에 심장을 꿰뚫렸던 그녀는, 그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현실세계의 단 하나뿐인 목숨을 잃고 만 것입니다.



아야키치 슌: "주, 주, 주, 죽었어…! 칼로 목을 찔렀다고! 저건 가상현실이 아니야! 진짜로 죽었어!"

"슌, 진정해요! 패닉에 빠져선 안돼요!"

아야키치 슌: "무슨 소리야, 한나! 사, 사람이 죽었다고! 이건 더 이상 게임 같은 게 아니란 말야! 침착 같은 소릴 할 때가 아니라고!"

"왜, 왜 그러는 거에요…? 무슨… 사람 죽는 걸 처음 보는 것처럼…?"

아야키치 슌: "……뭐?"



슌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저를 낯설게 바라보던 그 때, 단검 손질을 마친 피에로 마스크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피에로 마스크: "하핫, 분명히 '마지막'이라고 말해뒀는데. 카리나 쨩은 멍청하네. 살려달란다고 살려줄 거면 유언 같은 건 물어보지도 않을 거라고! 처음과 마지막은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말야, 카리나 쨩은 너무 초라하게 가버렸네. 너희도 동의하지? 응? 하핫. 핫."

유키야마 카무이: "……."

타치바나 츠나요시: "이런… 이런 제기랄…!"

아자부 이토리: "이 개… 씨발새끼들이… 뚫린 입이라고!"

후네즈 신지: "……이게 대체 무슨?"



여전한 모노쿠마 뱅글의 방해로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며 분개하는 아자부 양과 타치바나 군. 동료의 죽음에 충격받은 듯 입을 떡하니 벌린 후네즈 군.

여기저기서 비명이 피분수처럼 터져나오는 시청자 오디오. 괴성에 가까운 혼돈.

하지만 충격적인 영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피에로 마스크: "아아, 선배~! 그쪽은 정리 끝났습니까? 스태프랑 경비 놈들 말이에요! 하핫!"

늘씬한 피에로: "…물론."



이번엔 소음기를 끼운 권총을 든 늘씬한 피에로가 화면 밖에서 걸어들어왔습니다. 반대쪽 손엔 경비원 복장의 성인 남성으로 보이는 시체를 질질 끌며 피의 궤적을 남긴 그는 재킷에 달린 무전기에 대고 보고했습니다.



늘씬한 피에로: "이걸로 단간론파 녹화 시설 완전 점거를 완료했다…. 가상현실 쪽은 이미 <바이러스> 침투가 끝난 모양이군."

피에로 마스크: "예엣, 물론! <모노사메>는 착실하게 자기 일을 해주고 있어요~ 그 곰 새끼도 벌써 알아서 처리해버렸다고요! 잘했죠? 잘했다고 해주세요 누님!"

늘씬한 피에로: "…아직 임무중이다, 집중해…. '초고교급'이 깨어났을 거다. 가서 처리해."

피에로 마스크: "아하핫, '벌칙' 말이군요! 네엣! 바로 대령하겠사옵니다~ 하핫, 하하핫! 하하핫!"



뚱뚱한 피에로는 신이 난 목도리도마뱀처럼 화면 밖으로 뛰쳐가며 바닥에 밟힌 시체들을 마구 짓밟았습니다.

늘씬한 피에로는 그런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카메라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렌즈 앞에 자세를 잡고 앉았습니다.

길고 매끄러운 머릿결을 조각한 듯이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잠시 매만지던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골라 입을 열었습니다.



늘씬한 피에로: "혼란스럽겠지, 물론. 가상현실 속에 있는 너희들과 생방송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시청자들. 불쌍하네."

키쇼: "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심까…."

늘씬한 피에로: "딱히 대답할 필욘 없어. 아니, 웬만하면 입다물고 듣기만 해."

키쇼: "흡…."



불쌍한 키쇼 군은 미피처럼 x자로 입을 꾹 오므렸습니다.



늘씬한 피에로: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옳을까나. 안녕? 이 언니는 악의 비밀결사의 일원, <시온 피트>라고 해. 보시다시피 무장 테러리스트고, 지금은 오지에 비밀스레 숨겨져있다는 <단간론파> 촬영 시설을 습격해서 강제 점거했습니다☆. 이 테러리스트 피에로 언니도 말로만 듣던 찐 초고교급 여러분들을 만나게 돼서 참 가슴이 들뜨네. 감개무량해, 아주."

후네즈 신지: "시온… 피트?"



스스로를 시온 피트라고 밝힌 그녀의 시선이 붉은 손톱에서 카메라 렌즈로 옮겨왔습니다. 가면 아래서 날카로운 동공이 반짝이는 게 보였기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시청자들 쪽에서 시온 피트가 누구인지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지만 뾰족한 대답을 내놓는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시온 피트: "우리의 목적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너희가 지금껏 알고있던 허접한 살인게임 따윈 깔끔하게 잊어.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천공호텔 단간론파>다.

죽어도 죽지 않는 살인게임, 전세계에 방영되는 엔터테인먼트성 예능.

죽어도 죽지 않으니 가능한 트릭.

죽어도 죽지 않으니 가능한 공범.

죽어도 죽지 않으니 가능한 매수.

죽어도 죽지 않는, 그런 미지근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흘러가는 학급재판….

그딴 좆병신같은 소꿉놀인 이제 끝이야. 더는 없어. 너희는 마지막 기회를 놓친 거야.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 버러지들의 목숨은 단 하나 뿐이다.

어느 누구라도 가상 현실에서 목숨을 잃으면 그 순간 나와 저 돼지가 손수 목을 그어버리겠어.

즉 가상 현실에서의 게임 오버가 곧 너희의 진짜 최후라는 거지. 이해했어?"


아자부 이토리: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윽!"


시온 피트: "아아, 안 되지. 이토리 쨩. 모노쿠마 뱅글을 착용하고 있는 가상 현실 속에서 너희가 내게 반항할 수 있는 수단따윈 없어. 자꾸 그러다간 확 심장 터뜨려버릴지도 몰라? 가상현실 속에서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그랬더라~? 방금 설명했는데,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아자부 이토리: "이, 이게…!"

타치바나 츠나요시: "참으시오, 보디가드 소녀…! 지금은 일단 참고 견뎌야 하오…!"

아자부 이토리: "…!"


시온 피트: "하하. 좋아. 잘 했어, 떡대. 앙칼진 고양이가 꼬리를 내리는 꼴이 아주 마음에 들어. 자, 그러면 슬슬 시작해볼까? 이봐, 돼지! 아직 멀었어?"

피에로 마스크: "하이잇~! 지금 바로 화면 대령하겠습니다!!"

시온 피트: "모노사메! 당장 멘트 날려! 위대한 리얼 살인게임의 서막이다! 화려하게 장식하라고!"

모노사메: "오오, 준비되었구만!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네! 다들 마음의 준비는 되었겠지?"



그레이트 에구이사루에 올라탄 모노사메가 확성기 기능을 사용해 다시금 그 소름돋는 기계음으로 말을 뱉었습니다.

절대로 두 번 듣고싶지 않았던 그 말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당시엔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그 말을.




모노사메: "초고교급 펜싱선수 키리누키 켄마 군, 그리고 오컬트 소녀 레이몬 하루히 양을 위한 특별한 벌칙을 준비했다네!

자, 그러면 다같이 힘차게 가봅세!

벌칙, 스타트!"





-




《처형명: 등잔 밑이 어둡다》




….



긴 머리칼의 피에로를 비추던 화면이 잠시 암전되더니, 이윽고 낯선 화면으로 전환된다.

어둡고, 간혹 끊어진 전선에서 스파크가 튀는 음침하고 넓은 공간.

카메라 앞에서 얼쩡거리던 피에로 마스크가 황급하게 구석의 복도로 사라지고, 그의 뚱뚱한 몸뚱이에 가려져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등을 맡댄 채 밧줄에 묶여있는 건, 초고교급 펜싱선수 키리누키 켄마와 레이몬 하루히의 모습이다.

가상현실과는 조금 다른, 꽤 수수한 환자복 같은 옷차림을 한 그 둘은 아직 의식이 미처 돌아오지 않아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곧 눈부신 조명이 일제히 쏟아져 둘을 강타하고, 레이몬 하루히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린다.

포박된 자신과 파트너, 그들을 관찰하는 카메라를 보며 당혹스러워하다, 몸을 흔들어 키리누키 켄마를 깨운다.

레이몬 하루히에게 상황을 전달받은 키리누키 켄마는 어떤 수를 쓴 건지 손쉽게 속박을 끊어낸다. 그의 손에는 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예리한 은빛 단검이 쥐어져있다.

레이몬 하루히는 복도를 발견하고 키리누키 켄마를 그쪽으로 이끈다.

…그리고 약 10 초 뒤,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알 수 없는 상어 머리의 근육질 괴한들이 수없이 몰려들어 복도를 습격한다.

카메라가 상어 괴한들의 뒤를 따라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잠시 암흑이 지속되다가, 카메라가 적외선으로 전환된다.

걸음이 느린 키리누키 켄마와 레이몬 하루히는 이미 따라잡힌지 오래지만, 비수 하나를 무기로 삼은 키리누키 켄마의 분전으로 상어 괴한들은 그들을 해치지 못한다.

도망가세요!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 테니!

괴인을 베어넘기며 키리누키 켄마는 외쳤다.

레이몬 하루히는 파들파들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더 암흑 속을 파고든다.

카메라는 잠시 키리누키 켄마의 기적과도 같은 몸놀림을 비추다, 도망간 레이몬 하루히를 뒤쫓는다.

정작 키리누키 켄마와 떨어지니 한 치 앞도 살필 수 없는 그녀는 벽에 부딪히고, 긁히고, 또 넘어진다.

벽을 더듬어가며 달아나던 레이몬 하루히는 문득 걸음을 멈춘다.

키리누키 켄마가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까.

아무리 초고교급 펜싱선수인 그라고 해도, 그 짧은 비수로는 괴한들의 소모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버릴 게 뻔했다.

그렇다면 머지 않아 그녀마저 같은 최후를 맞을 게 분명했을 뿐더러, 그런 결말은… 레이몬 하루히는 원하지 않았다.

그때 복도의 끝에서 작은 불빛이 솟아오른다.

불그스름하고 따뜻한, 불빛.

레이몬 하루히는 홀린 듯이 불빛을 향해 뛰어간다.

복도 모퉁이에 무심하게 걸려있는 횃불, 그 아래에 놓인 한 자루의 사브르.

그녀는 운명의 갈림길을 포착했다.

횃불을 챙긴다면… 그녀는 괴한들에게 잡히지 않고 빠르게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몬 하루히는 검을 챙긴다. 다른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무거운 쇠붙이를 질질 끌며 그녀의 파트너에게로 돌아간다.

빨리, 더 빨리. 상어들이 파트너를 잡아먹기 전에.

아, 그가 보인다. 여전히 화려한 검무를 펼치며 그녀를 위해 사투를 벌이는 키리누키 켄마가 보인다.

이제, 이제 이 검을 전해주기만 하면….

그때.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피에로 마스크가, 달려나가던 레이몬 하루히를 밀어버린다.

벽에 부딪히며 볼품없이 쓰러지는 연약한 다리.

피에로 마스크는 그녀가 들고 온 검을 쥐어들고, 소리 죽여 키리누키 켄마의 등 뒤로 다가간다.

키리누키 씨…. 애처롭게 불러보지만, 전투에 열중한 그는 인지하지 못한다.

키리누키 씨.

조금 더 크게.

키리누키 씨!

…하루히 양?

드디어 목소리가 닿은 그 순간, 예리한 사브르가 키리누키 켄마의 눈을 기분 좋게 꿰뚫는다.

하루히… 양?

아아.

그렇구나.

키리누키 켄마가 단검을 떨어뜨린다.

그와 동시에 상어 괴한들이 일제히 그의 등 뒤로 달려들어, 그의 머리, 그의 어깨, 그의 손과 발, 그의 모든 것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꾸드득, 꾸득, 우드득.

뼈와 근육을 아작내는 턱 운동의 멜로디.

괴한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파트너를, 레이몬 하루히는 망연자실하게 바라본다.

식사 중인 괴한들을 밟고 또 다른 괴한들이 넘실넘실 파도쳐온다.

피에로 마스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홀로 남겨진 그 볼품없는 소녀의 곁엔 덧없이 타오르는 횃불 한 자루밖엔 없다.

톱날 같은 이빨이 발목을 으스러뜨린다.

바스라지는 비명. 뼈가 갈리는 소리. 음식물이 식도를 넘어가는 소리.

그런 소리들이 복도를 메워나간다.

한동안 횃불이 불타다가, 소리가 멎을 때에 맞춰 까맣게 빛을 잃는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




아야키치 슌: "……하,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아야키치 슌: "풀썩."

아자부 이토리: "……."

아자부 이토리: "아, 안돼… 아…. 안돼, 또, 또 시작이야, 또….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또…."

웃음 아닌 웃음을 터뜨리다 기절해버린 슌과, 혼잣말을 하며 엄지손가락을 물어뜯는 아자부 양.



유키야마 카무이: "……."

쇼코라 치에: "끼,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엄마, 엄마! 엄마아!!!!"

조용히 검은 화면 속을 응시하는 유키야마 군,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내는 쇼코라 양.



타키모리 유미코: "……아. 이젠 하다하다 헛것이 다 보이네…. 역시 과로가 문젠가? 헤헤, 헤. 아니, 거짓말일 거야. 저딴 건 다 거짓말…."

토미하레 소루: "……."

토미하레 소루: "……아름다워…!"

타키모리 유미코: "……?"

현실을 부정하는 타키모리 양과, 믿기지 않는 광경에 고장나버린 듯한 토미 군.



타노 나타타: "…아하핫! 아하하핫! 아, 잠이 확 깨네! 뭐야 방금? 방금 그거 뭐였어? 다시 보여줘, 다시! 아핫!"

타치바나 츠나요시: "……!!!"

마치 재미있는 서커스라도 봤다는 듯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타노 양, 말없이 눈빛을 불태우는 타치바나 군.



이시미네 칸: "…하아. 아직 정리할 서재가 산처럼 쌓여있는데……."

이나모리 쿠키: "……미~친넘."

뜬구름 잡는 소릴 하는 이시미네 군과, 그를 째려보며 한마디 독설을 뱉는 쿠키 양.



후네즈 신지: "……♤."

아리스 윈터우즈: "…아, 아핫…. 풀썩."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아끼는 후네즈 군, 눈이 빙글빙글 돌다가 그대로 기절해버린 아리스 양.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피해자는 목을 찔러 살해, 검정은 화려한 처형식이라…."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무라마사 군.



키쇼: "끅, 부릅, 부르르르르릅…."

시가라토 유즈: "야, 얌마! 숨 쉬어! 숨 쉬어! 젠장, 거품 물었잖아…!"

거품을 물고 쓰러진 키쇼 군과 그를 부축하는 시가라토 양까지.


누군가는 회피하고, 누군가는 거부하고, 누군가는 무너지고, 누군가는 웃어넘기고….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시선으로 눈앞에서 벌어진 대참극을 어떻게든 받아들여보려 노력했습니다.


자신이 끌고온 수라도 속에서 만족스럽게 웃음짓던 모노사메는, 그 검은 화면과 함께 유유히 사막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돔의 하늘이 변했습니다.

절망. 압도적인 절망에 빠진 시청자들의 곡소리가 검은 밤하늘로 치환되면서 유령의 단말마처럼 차츰 사라져갔습니다.

돔의 천장은 더 이상 눈부신 별빛들로 빛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라도 몇 조각으로 갈라질 듯한 불길한 빛깔의 폭풍우가, 세찬 비와 거센 바람을 몰고 베가스의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뚝.

뚝뚝.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이윽고 걷잡을 수 없는 폭우가 되어, 사막의 모래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누구 하나 걸음을 옮기는 이는 없었지만….








"……으음."


어째선지 저 만큼은.

오로지 저 만큼은, 이런 상황에서도 기계처럼 생각하고, 기계처럼 판단하고, 기계처럼 움직이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저의 저주이기에.

저는 혼자 읊조렸습니다.


"…카라스야마 류이치, 우린 대화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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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호텔 단간론파 챕터 1
<체크 인, the 절망 호텔> & <감이 좋아서 분해!>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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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일람>

A] <초고교급 카지노 딜러> 카미나기 한나
A] <시청자 대표> 카라스야마 류이치

B] <초고교급 보디가드> 아자부 이토리
B] <초고교급 갬블러> 아야키치 슌

C] <초고교급 JK?> 쇼코라 치에
C] <초고교급 ???> 유키야마 카무이

D] <초고교급 상담부원> 타키모리 유미코
D] <초고교급 현악부원> 토미하레 소루

E] <시청자 대표> 레이몬 하루히 OUT!
E] <초고교급 펜싱선수> 키리누키 켄마 OUT!

F] <초고교급 실험부원> 타노 나타타
F] <초고교급 대장장이> 타치바나 츠나요시

G] <초고교급 랭킹메이커> 이나모리 쿠키
G] <초고교급 사서> 이시미네 칸

H] <초고교급 동화작가> 아리스 윈터우즈
H] <시청자 대표> 후네즈 신지

I] <시청자 대표> 시무라 카리나 OUT!
I] <초고교급 변호사> 무라츠바키 마사오미

J] <초고교급 르포기자> 시가라토 유즈
J] <초고교급 연극배우> 키쇼


모노쿠마 OUT!
모노사메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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